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나는 요오드팅크라는 이름을 초등학교 <실과(實科)> 시간에 처음 들어보았다. 가축이 새끼를 낳으면 탯줄을 자르고 그 자리에 발라주는 소독약으로 기억한다. 이름이 특이해 기억에 오래 남은 것 같다. 하지만 가축이 새끼를 낳는 일은 본 적이 없어 요오드팅크를 볼 기회는 없었다(아쉽게도 지금까지 요오드팅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때 ‘빨간약’과 요오드팅크가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요오드 팅크는 1839년에 처음으로 소독제로 쓴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특히 미국의 남북 전쟁 때 부상병들의 상처 소독에 널리 썼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내가 만난 빨간 소독약은 요오드 팅크의 후손 격인 베타딘(Betadine은 상품명)이었다. 의과대학생 시절, 임상실습에 나간 나는 당뇨병 환자들이 대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장면을 종종 보았는데, 그것을 베타딘 소킹(soaking; 담그기) 치료라 했다.

수술장에서는 베타딘이 약방의 감초였다. 수술 전에 의사들이 손을 소독하는 것도 베타딘, 수술 전에 피부를 소독하는 것도 모두 빨간 베타딘이었다. 내가 아는 ‘빨간약’보다는 좀 덜 빨갰고, 특이한 냄새가 났다.

그 외 살균-소독제로 쓰는 것들이 있다. 눈 세척이나 화상에 사용하는 ‘보릭’으로 부르는 붕산(Boric acid), 구강 ‘가글’ 세정제로 쓰는 클로로헥시딘(Chlrohexidine gluconate), 등이다. 수년 전에 신생아들에게 사용이 금지된 보릭을 사용한 산후조리원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은 아이들이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부모들은 항생제나 스테로이드가 든 ‘연고’를 얼른 발라준다. 그 덕분인지 아이들의 종기도 많이 줄었다. 좋은 일이다. 전문가들은 가벼운 상처라면 충분한 양의 물과 비누를 이용해 상처를 잘 씻은 후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은 후 항생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된다고 한다(https://health.clevelandclinic.org/what-is-hydrogen-peroxide-good-for/).

다시 상처로 되돌아 가보자. 60~70년대에 개구장이들을 괴롭힌 종기는 다쳐서 생긴 상처가 감염되어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더러운 손으로 긁어 만든 부스럼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는 나를 비롯해 손톱 아래에 때가 까맣게 끼인 아이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용의검사’라는 것을 했을까?

제 탓으로 다치거나 긁어서 곪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도 칠 수는 있다. 하지만 외과 의사들이 정성 들여 수술한 자리에 감염이 생겨 곪는다면 큰 일이다. 더구나 곪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변으로 넓고 깊게 염증이 번져 봉와직염(蜂窩織炎; 벌집모양의 염증이란 뜻이다. cellulitis)을 만들고 더 나아가 패혈증(septocemia)으로 진행해 환자가 수술로 얻은 것은 결국 죽음이라면 큰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의사들은 수술을 해야 할 지 하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감염이 생길지 말지를 사람의 손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전히 운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행운의 확률은 턱없이 낮았다. 대부분은 수술 후 감염이 생겼다.

19세기 중반 마취가 등장하기 이전에 외과의사들은 쇼크와 통증 때문에 수술을 꺼렸다. 특히 통증을 줄이기 위해 의사들은 엄청난 속도로 재빨리 수술을 끝내야 했다. ‘속전속결’의 원칙은 외과의사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수술 마취법이 등장하자 외과의사들은 느긋하게 수술을 할 수 있게 되고, 조금 더 대담한 수술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문제가 생겼다. 수술을 많이 할수록 수술 감염도 그 만큼 늘어났다. 수술 감염은 막을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꼼꼼하게 수술을 해도 며칠 지나면 그 자리가 덧나고 염증(감염)이 시작되었다.

통증은 마취로 해결되었지만 감염은 여전히 수술의 큰 장벽이었다. 그래서 어렵게 발견한 마취법은 외과 수술에 기대만큼 큰 활력소가 되지 못했다. 여전히 외과 의사들은 수술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하버드대병원의 교육병원인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의 통계를 보면 1847년부터 1870년까지 23년 동안 수술은 모두 1,924건이 있었다(매년 평균 84건). 1,098건은 절단 수술, 237건은 가슴 종양 수술, 나머지는 다른 부위의 수술이었다. 이 통계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1846년 10월에 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수술 마취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마취가 가능했지만 수술 건수는 매년 100건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수술 실적이 저조했던 것은 바로 감염 때문이었다. 어려운 수술이건 쉬운 수술이건 감염을 피할 수 없었다. 수술받은 환자들 모두 감염도 잘 되고 목숨도 잘 잃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배를 열고 들어가는 개복(開復)수술은 아예 불가능했다.

당시에 수술을 받은 환자들 앞에는 5개의 미래가 놓여있었다. 좋은 고름(나중에 살펴볼 것이다)만 생기고 회복(포도상구균 감염), 무시무시한 단독(연쇄상구균 감염),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원 괴저(혼합 감염으로 특히 혐기성 세균 감염), 파상풍(지금도 매년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신경계 감염), 마지막으로 아무 문제없이 회복되는 것.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버넷(Horace Vernet) 작품 '발미 전투(The Battle of Valmy)'의 일부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버넷(Horace Vernet) 작품 '발미 전투(The Battle of Valmy)'의 일부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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