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에든버러에서 젊은 리스터를 기다린 54세의 제임스 사임은 ‘외과의 나폴레옹’으로 불린 사람이었다. 별명에 걸맞게 작은 체구에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의 수술은 섬세하고도 간결했다. 특히 다리를 절단할 때도 가능하면 무릎 아래가 아닌 발목을 절단해 몸을 더 많이 보존하려 했다. 환자에게는 장애를 줄이는 효과를, 의사에게는 수술 시간을 줄이는 이중의 효과가 있었다(이 정도면 수술실의 경제학자라 불러야한다!). 에든버러가 영국 수술의 수도라면, 사임은 당대 최고의 외과의였다.

오래된 병원의 수술실은 사람들과 꽉 차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좌석까지 빈 자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임의 수술을 보기 위한 구경꾼들이 700~800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때 사임의 명성과 능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그의 손은 변함없이 안정되고 눈은 변함없이 정확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외과의사들 중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가장 훌륭한 외과의사였다. 그가 친숙한 조수들과 외과 인턴들, 소독수들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서면 속삭이는 소리와 조용한 박수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구경꾼들은 연령대와 지위가 다양한 의사들이었고 그 중 상당수는, 그의 뛰어난 솜씨를 보기 위해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환자는 마취 상태였다. 사임이 예복 단추를 채우고 소매를 걷었고 나는 피가 튀는 것을 보았다. 몇 분 후 환자는 들것에 실렸고, 큰 박수소리가 나며 수술이 끝났음을 알렸다.
-1850년대, 에든버러의 외과의사 사임(James Syme)의 수술 장면; 셔윈 눌랜드 『닥터스』에서

사실 도시 분위기만으로 보면 에든버러가 런던보다는 더 끔찍했다. 하지만 수술 수준만 놓고 본다면 런던이 한 수 아래였다.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병원(Royal Infirmary of Edinburgh)은 리스터가 배우고 수련을 받은 UCL병원보다 더 크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물론 샤피 교수가 소개한 사임은 여기에서 일했다. 이 곳에서 리스터는 사임의 신임도 얻고 외과에 대한 잊어버린 열정도 되찾았다. 어느덧 예정했던 한 달을 넘기고 말았다.

해가 바뀐 1854년 1월, 사임은 리스터에게 외과 수련의 자리를 제안한다. 런던에서 외과 수련의를 이미 마친 리스터에게는 격에 맞지 않은 자리일 수도 있지만 리스터는 사임에게 많이 배우고 싶고, 한편으로는 스코틀랜드 의사 면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말까지 근무하기로 했다. 물론 사임도 여느 수련의 대하듯 리스터를 하대하지 않고 어엿한 동료로 대했다. 리스터는 사임 곁에서 외과의로 새로 태어났다.

예정했던 한 달, 그리고 다시 한 해를 넘기고 1855년이 되었다. 2월이 되면 1년 시한의 수련의 자리도 끝이 날 것이다. 리스터는 런던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마침 공석이 된 사임의 조수 자리에 지원한다. 곧이어 왕립병원의 부 외과의사로 임용되었다. 이제 28세의 리스터는 사임의 오른팔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1855년의 리스터와 사임. Wikipedia 자료
1855년의 리스터와 사임. Wikipedia 자료

다음 해 봄인 1856년 4월에 리스터는 사임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한다. 퀘이커교도인 부모님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리스터는 사랑을 위해 국교회(성공회)로 개종한다. 하지만 퀘이커의 생활 방식마저 버리진 않았다.

리스터 부부는 3개월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그런데 여정을 살펴보면 여느 신혼부부의 허니문이 아니라 청년의사의 수학여행같았다. 마치 미루어 둔 그랑투어같다. 부부가 다닌 곳들을 살펴보면 이탈리아의 파도바(현대의학의 발상지), 프랑스의 볼로냐(유서 깊은 의대가 있다), 빈, 프라하, 베를린, 뷔르츠부르크, 파리… 특히 빈에서는 저명한 병리학자 카롤 폰 로키탄스키 (Baron Carl von Rokitansky)도 만났다.

저명한 의사학자이자 외과의사인 셔윈 눌랜드(Sherwin B Nuland)는 로키탄스키 덕분에 병리학이 의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평가할 만큼 병리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로키탄스키다. 그는 14년 전에 업톤으로 아버지 리스터를 찾아온 인연(아마도 현미경 때문이었을 것이다)이 있어 아들 리스터를 반겨 맞아주었다.

아들 리스터와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젬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1865)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는 않다. 젬멜바이스는 로키탄스키의 동료였던 헝가리 출신의 산부인과의사로 1848년(!)에 염소용액으로 의사들이 손을 씻으면 산욕열을 예방할 수 있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던 이그나츠 젬벨바이스. Wikipedia 자료.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던 이그나츠 젬벨바이스. Wikipedia 자료.

하지만 그의 주장은 주변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만다(비슷한 운명이 리스터에게도 기다리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 그의 과격한 성격과 아쉬웠던 설득력 탓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낙심한 젬멜바이스는 1850년에 빈을 떠나 부다페스트로 되돌아가버렸다. 그래서 리스터와는 만날 수도 없었다.
젬멜바이스는 소독을 주장한 산부인과 의사였고, 리스터는 소독을 주장할 외과의사이다. 만약 리스터가 빈에서 젬벨바이스를 만났거나 아니면 로키탄스키로부터 손 소독이야기를 들었다면 의학의 역사가 조금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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