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 민수진 회장
온몸 돌아다니는 급성부종…신장염·위장염 등으로 오진
호흡곤란·극심한 복통에도 의사조차 잘 모르는 희귀질환

얼굴·목·복부·손·발·엉덩이·성기 등에 '급성부종' 형태로 급성발작 증상이 나타나는 유전성혈관부종(HAE·Hereditary Angioedema)은 진단방랑이 아주 심각한 희귀질환이다. 인구 5만~15만명 당 1명 꼴로 발병해 국내 약 1,000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이 병을 확진받아 제대로 치료 받는 사람은 100여명에 불과하다.

급성 후두부종으로 숨길이 막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내장부종으로 산고보다 더한 고통에 신음하는데도 대학병원 응급실 의료진조차 이 병에 대해 잘 몰라 제대로된 처치조차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특정 부위의 몸이 붓고 내장부종으로 복통을 호소하기 때문에 대체로 알레르기질환, 신장염, 위장염 등으로 오진된다.

하지만 유전성혈관부종은 알레르기질환·신장염·위장염 등과 완벽히 다른 질환이다. SERPING1 유전자·PLG 유전자·ANGPT1 유전자 등의 변이로 인해 체내 C1-에스테라제(C1 esterase) 억제제의 결핍이나 기능부전이 초래됨으로써 혈관 내 체액이 혈관 밖으로 빠져나가 신체 여러 곳에 부종이 반복되는 유전성 희귀질환이기 때문이다.

한국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 민수진 회장도 30년 넘는 진단방랑 끝에 겨우 자신의 병을 알게 됐다. 민 회장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12살 때였다. 어느 밤 답답해서 깨어나보니 얼굴은 부어올라 눈은 사라지고 없었고 입술은 뒤집어지고 코와 볼 높이가 같았다. 혈관부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살이었지만 민 회장이 자신의 병명을 유전성혈관부종이라고 알게 된 것은 최근에서다.

​​한국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 민수진 회장
​​한국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 민수진 회장

35년 전 그 밤 민 회장은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지만, 의사들은 끔찍하리만치 부풀어오른 얼굴 부종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민 회장은 "혈액검사·소변검사·영상검사 등 모든 검사를 다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오면서 의사는 신장염인 것 같다고 말했었다"고 설명했다.

그 뒤 민 회장의 어머니는 아주 엄격한 신장염 식단의 음식만을 그녀에게 줬다. 김치 같은 짠 음식은 물론 친구들과 도시락을 같이 먹는 것도, 방과 후에 분식을 사먹는 것도 금했다. 그럼에도 부종은 나이지기는 커녕 악화되기만 했다고.

민 회장은 "첫 증상 이후 손이 붓고 발이 붓고 엉덩이가 붓는 등 온 몸을 돌아다니며 부종이 생겼다"며 "어느 땐 목이 부어올라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처럼 괴롭고, 어느 땐 내장이 부풀어올라 죽을만큼의 복통과 함께 초록물이 나올 때까지 수없이 토하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원인 모를 고통, 업보로 여기며 견뎠는데…

신장염 환자로 알고 산 지 6년 뒤 민수진 회장은 병원에서 재검을 했다. 재검 결과는 신장염이 아니라는 허탈한 결과였다. 아무 이유 없이 때론 몸 한곳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 때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고 때론 산고를 뛰어넘는 복통에 시달리는 것이 업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위중한 상황에도 병원을 덜 찾게 됐다. 민 회장은 "경험적으로 후두부종이 와도 병원에서 할 수 있는 특별한 처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런 상황이 와도 병원에 안 가게 됐다"며 "혼자 어떻게든 기도를 확보할 수 있는 자세로 밤을 새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할 때는 부모에게 '차라리 죽으면 안 돼'라는 말도 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견뎠다.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일은 그녀가 부모가 된 뒤 찾아왔다. 그녀에게 나타난 증상이 큰아들에게 똑같이 재현됐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녀는 유전병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들에게 후두부종이 처음 나타난 날, 그녀의 집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러나 그 난리 속에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도 그녀와 똑같이 아들도 견디는 것밖에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한다. 2018년 초 열다섯 살이 된 큰아들에게 두 번째 후두부종이 나타났을 때, 민수진 회장은 더는 그 끔찍한 상황을 견딜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괴로워하는 아들을 두고 민 회장은 미친 듯이 인터넷을 뒤졌다. 언젠가 한 내과의사가 '혈관부종 같은데'라고 했던 말과 그들 모자의 증상 등에 의지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 때까지 인터넷을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그 밤 한 기사를 통해 해결책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당시 유전성혈관부종의 급성발작이 나타날 때 증상을 빠르게 가라앉혀주는 주사제, 샤이어코리아의 '피라지르'가 국내 허가 받은 상황이었다. 그 약에 대해 정보가 담긴 기사를 민 회장이 보게 된 것이다. 민수진 회장은 그 약제를 어떻게든 아들에게 써보고 싶어 그 기사를 쓴 약업신문 기자와 더불어 샤이어코리아, 서울대병원 등 3곳을 돌아가면서 수없이 전화했단다.

하지만 당시 그 약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2018년 2월 건강보험심사평원의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피라지르의 급여가 결정됐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이 결렬되면서 출시가 미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이어는 치료제가 전무한 상황을 고려해 결국 그 해 6월 비급여 론칭을 했고, 그제야 피라지르가 국내 병원에서 처방됐다. 그 해 9월에는 급여까지 적용됐다.

아들의 후두부종이 가라앉은 뒤 제대로 병을 진단 받기 위해 민수진 회장은 서울대병원 진료를 예약해보려 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유전성혈관부종 진료는 알레르기내과에서 이뤄지는데, 당시 큰아들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기 때문에 소아청소년과가 아닌 알레르기내과 강혜련 교수 진료 예약마저 큰 벽이었던 것이다.

민수진 회장은 병원 관계자와의 수차례 통화 끝에 마지막으로 강혜련 교수에게 딱 한 번만 '유전성혈관부종이 의심되는 아이인데 진료를 봐줄 수 없느냐'고 물어봐 달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강 교수의 수락으로 진료가 이뤄진 2018년 6월 어느 날 온 가족이 경남 창원에서 서울까지 올라갔다. 아들의 혈액검사 뒤 장장 30년 넘게 그녀를 괴롭힌 고통의 원인이 유전성혈관부종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날이었다.

목소리 내기 시작한 국내 유전성혈관부종환우들

강혜련 교수 진료를 통해 민 회장은 그들 모자처럼 미진단 유전성혈관부종 환자가 국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됐다. 그녀처럼 오진되거나 병의 원인을 몰라 홀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제대로 진단돼 치료 받는 사람보다 국내 더 많고 진단만 받으면 치료제를 통해 고통을 빠르게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도 체험을 통해 알게 될 쯤, 강혜련 교수와 글로벌 유전성혈관부종모임인 'HAE International'의 도움으로 국내 유전성혈관부종 환자 모임이 열렸다.

그날 모임 뒤 환우회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15명 정도의 환우가 뜻을 같이 해 한국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HAE Korea)가 만들어졌다. 초대 회장은 민수진 회장이 맡았다. 2019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당시 급성부종이 안 생기게 예방할 수 있는 약제가 글로벌에 나와 있었지만 국내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이 예방약이 하루 빨리 국내 도입될 수 있게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선 것이다.

그간 민수진 회장의 주도로 환우회가 목소리를 내면서 국내 유전성혈관부종 치료 환경은 여러 가지 달라졌다. 처음 회장을 맡은 뒤 1년간 직장을 휴직하고 그녀는 서울·부산·대구 등 전국 대학병원 이상의 의료기관 의료진을 찾아가 이 병에 대해 알리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제 국내 대학병원 이상의 모든 의료기관에서 피라지르가 처방되고, 병을 진단 받은 환우에게 HAE Korea에 대한 정보도 제공된다.

이 같은 노력에 힘 입어 올해 창립 5년 째가 된 HAE Korea의 회원은 약 50명으로 늘었다. 또 환우회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에는 1회 처방 피라지르 1개에만 보험이 적용됐던 것이 2021년 3월부터 1회 처방 2개로 확대됐다. 지난 2021년 2월에는 혈관부종을 예방할 수 있는 다케다제약의 '탁자이로'가 국내 허가를 획득했다.

예방약 현재 쓸 수 없지만…"더 좋은 치료환경 만들어질 것"

그러나 국내에서 탁자이로는 현재 쓸 수 없는 약이다. 급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출시가 미뤄지고 있는 까닭이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탁자이로와 같은 약이 현재 6종 처방되고 있지만 국내는 단 한 개의 약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민 회장은 "탁자이로가 실제 환우의 손에 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지금 가장 큰 고민"이라며 "또한 이 병은 심한 경우 한 달에 8번 넘게 급성 발작이 생기는데, 한 번에 피라지르를 2개만 처방받을 수 있어 한 달에 4번 넘게 대학병원에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고 개선을 촉구했다.

지난해 고3 입시생이던 민수진 회장의 아들도 극심한 스트레스에 일주일에 3~4번 급성발작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는 그녀와 남편이 피라지르를 처방받기 위해 삼성창원병원까지 일주일에 두 번 꼴로 가기도 했다.

진단도 잘 되지 않고, 치료 환경도 아직 열악하지만 그래도 민 회장은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린다. 유전성희귀질환이지만 진단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료제가 있고, 아직 손에 닿을 수 없지만 효과적인 예방약도 개발돼 있기 때문이다. 또 글로벌에서는 유전자치료 등이 시도되며 이 병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는 치료제 개발도 이뤄지고 있다.

민수진 회장은 "아직 미국·호주 등에 비해 부족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충분히 더 좋은 치료환경이 국내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며 "앞으로 예방약이 상용화돼 유전성혈관부종 환우가 이 고통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편해졌으면 좋겠고, 궁극적으로 유전자치료를 통해 이 질환을 비롯한 모든 유전성희귀질환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청년의사 자매지 '코리아헬스로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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