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요즘은 별로 웃을 일이 없다. 정말로 속 시원하게 웃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얼마 전 나는 몇 개월만에 가장 크게 웃을 수 있었는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시민단체는 아젠다 파파라치다!"

이 말은 어느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일전에도 "우리 나라의 시민단체는 문어발식 경영을 하는 대표적 집단"이라는 말로 나를 웃긴 적이 있다. 그의 논지는 이랬다.

<시민단체, 즉 NGO의 역할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우리 나라의 시민단체는 선진국의 시민단체에 비해 너무 '정치적'이다. 선진국의 시민단체는 특정한 관심 분야(환경이면 환경, 핵이면 핵, 인권이면 인권, 복지면 복지, 소비자운동이면 소비자운동 등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와 노력을 오래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식견과 통찰을 갖추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위해 집요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행동하고 발언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시민단체는 이름만 시민단체이지 사실은 정치단체다. 일단 한번 유명해지고 사회적 위상을 획득하기만 하면 사회의 모든 분야를 다 '건드린다'. 그 분야에 대한 표피적 이해조차 겨우 갖춘 상태에서 마치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것처럼 시민이라는 이름을 빌어 '권력'을 부린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다 발을 담그고 있지 않나.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보다 더할 정도다. 유명한 모 시민단체에서 '복지' 분야를 담당하는 사람은 겨우 두 명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만 해도 '폭소'를 부를 정도의 독설은 아니다. 하지만, '아젠다 파파라치'라는 말은 '풍자'의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절묘한 언어유희였다. '아젠다(agenda)'라는 말을 한 마디로 번역하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의제, '이슈'보다 더 포괄적 의미의 토론주제, 정책 기조> 등을 뜻하는 말이다. '파파라치'라는 단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찍고 빠지는' 사람들이다. 파파라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물론 다이아나 왕세자비를 죽음으로 몰고 가서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기도 하고, '찍힌 사람'에 의해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시민단체, 혹은 시민운동에 대해 상당히 큰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내 선배의 이러한 '직언'은 우리 나라 시민운동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시민단체를 이런 식으로 깎아 내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부의 시민단체가 '이슈'를 찍어서 '아젠다'로 만드는 데까지의 역할만 하고 정작 '아젠다'가 형성된 다음에는 그 '아젠다'를 팽개치고 새로운 '아젠다'를 찾아 떠나는 무책임함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냉정한 검토도 필요할 때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시민단체가 선진국의 시민단체보다 더 큰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 시민단체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정부와 기존의 전문가집단의 책임이다. NGO가 'GO'의 역할의 일부까지 담당해야 할 만큼 우리 정부가 무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의료분야에 대해 비전문가인 시민단체가 너무 깊이 개입했다는 비판을 자주 접하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괴감이 밀려오는 것은 의료분야의 진짜 전문가들이 밟았던 '무관심의 전철' 때문인 것이다.

박재영 편집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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