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다른 모든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여러 달 동안 나는 거의 '문화생활'을 하지 못했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많은 분들께, 그리고 여전히 수배자 신분으로 어느 곳에선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을 분들께는 매우 죄송하지만, 나는 어제 영화관엘 갔었다.

그야말로 '충동적'인 영화관람이었지만, 내게 '충동'을 일으킨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그 영화'였다. '그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그저 '충동'으로 그쳤을, 문제의 '그 영화'는 '아이즈 와이드 샷'.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매우 유명한 감독과 탐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 시드니 폴락 등의 명배우, 그리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제작 과정 내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으니, 거의 1년 가까이 붙잡고 있는 의약분업이니 의료개혁이니 하는 화두들은 좀 잊었으면 좋으련만, 그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정만 의사인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의사라는 사실을 저절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아주 여러 번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소위 '리얼리티'가 있는 영화라면, 미국의 의사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 적어도 100평은 족히 됨직한 집에서 살고, 100∼200불 정도의 금액에 대해서는 전혀 연연하지 않고, 예약환자만 진료하고, 하지만 가끔 왕진도 다니고, 진료 예약을 받을 때 환자들 사이의 시간 간격은 1시간 30분 정도이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별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누린다는 사실이야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의사들을 봐도 능히 알 수 있고, 미국의 의사들은 한 사람의 환자에게 적어도 40∼50분 가량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HMO에 소속된 의사들의 가장 큰 불만이 '환자 한 사람당 진료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은 무려(!) 20분이었다.

진정으로 미국의 의사들이 부러웠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건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였다. 주인공은 아주 여러 번, 아주 다양한 곳(식당, 호텔, 창녀의 집, 파티장, 다른 병원, 옷 대여점 등)에서 자신이 의사임을 밝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된 반응은 '신뢰'였다. “의사 =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가 미국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의사들은 어떻게 그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을까? 미국의 의사들이 그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노력들은 어떤 것일까? 의사들의 노력 외에 또 다른 어떤 이유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지금, 한국의 의사들은 익명의 공간에서 굳이 스스로를 의사라고 밝히지 않는다.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부터도 '뭐 하는 사람이냐?'는 택시 기사의 질문에 그저 '회사원'이라고 답하고 만다.

많은 의사들이 의사와 국민 사이를 갈라놓은 원흉으로 정부와 시민단체를 꼽는다. 또한, 많은 의사들이 국민과 더 가까워지지 못했던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기도 하다. 구조적인 모순은 분명히 깨뜨리기 힘든 것이지만, 모든 문제를 '구조적'인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무책임한 행동이다.

모두가 쉽게 '자정'을 약속하는 지금, 적어도 다음 세대의 의사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나?

박재영 편집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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