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CO 2023]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 인터뷰
"제로섬 환경에선 고가 신약 급여 늘수록 필수의료 소외"

[시카고=김윤미 기자]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연례학술대회는 명실공히 항암 신약 개발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발표되는 연구 데이터 대부분이 신약 허가의 예고편이기 때문이다.

국내 암 환자와 그 가족들 역시 매년 이곳에서 발표되는 신약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를 근거로 정부에 빠른 허가 및 급여 적용을 촉구하는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매년 쏟아지는 고가 신약에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이 위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혹자는 현재의 고가 신약 급여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형국'이라며, 지속 가능하지 않은 보여주기 식 복지가 필수의료에 대한 재정 지원을 막고 있다고도 비판한다.

이에 본지는 항암 신약이 연구 발표가 쏟아지는 ASCO 2023에서 필수의료로서의 완화치료 도입을 외치는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를 만나 암 환자의 완화치료와 그 효과 및 완화치료 시스템 구축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줄 혜택에 대해 들었다.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

"연간 항암제에만 '2조' 쓰는데, 완화치료에는…"

김범석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ASCO에서는 암환자의 생존기간을 연장시킨 긍정적인 데이터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며 "좋은 약들이 많이 나오고, 의학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다만 이런 긍정적인 데이터들이 실제 약을 처방하는 진료 현장에서 임상적 가치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최근 ASCO에서 좋은 데이터들이 나오면 국내 암환자나 가족들이 정부에 민원을 제기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늘고 있다"면서 "정부 역시 민원 해결에 급급해 비용의 문제를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정부가 매년 항암제에 투입하는 보험 재정만 2조 가량이 된다"며 "이 막대한 비용이 소수의 환자와 일부 제약사에게만 돌아가는데도,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사회적 합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가의 항암제에 대한 치료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필수의료에 대한 재정 지원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는 묵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현재 정부가 말기 폐암 환자 한 명에게 면역항암제 치료 비용 1억5,000만원 정도를 쓰고 있는데, 정작 만년 적자로 운영이 위태로운 소아중환자실 또는 신생아중환자실에는 재정 지원을 꺼리고 있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김 교수는 "앞으로 소아암 환자들은 치료 받을 병원이 사라질 것"이라며 "현재 소아백혈병 완치율이 80%가 넘지만, 앞으로는 치료 받을 의사나 병원이 없어 다 죽어나갈 판"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환자 한 명에게 약물 치료 비용 1억5,000만원을 쓰면서도 암 치료에 필수적인 완화치료에는 단 한푼의 보험 재정도 투입하고 있지 않다"면서 "어떤 약제가 환자의 생존기간을 3개월 정도 연장시켰다고 하면 대단한 성과로 치켜세우면서, 암환자의 삶의 질 개선에 생존기간 연장까지 입증한 완화치료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2010년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에는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진단 초기부터 적극적인 완화치료를 시행한 결과, 완화치료를 받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전체생존기간이 약 3개월 연장됐다는 무작위 대조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김 교수 등 관련 의료진이 이 같은 완화치료의 효과를 설득하고 서울대병원 내 완화치료 전담팀을 꾸려 정부에 급여화를 위한 시범사업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부가 해당 시범사업에 배정한 예산은 9억 원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정부는 같은 시기 면역항암제 등에 3,600억원이 배정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완화치료, 진정한 환자 중심의 의사결정으로 가는 길"

김 교수가 설명한 암환자에 대한 완화치료는 다음과 같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로 구성된 완화치료 전담팀이 암 진단 초기부터 환자에게 배정돼 현재 질병 상태를 제대로 알리고, 환자 개인의 경제 사정 등을 종합해 선택 가능한 치료 전략을 함께 논의하며, 환자 중심의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또한 임종이 가까워지는 시점에는 돌봄 서비스와 함께 연명치료 등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환자에게 부여함으로써 환자 스스로가 원하는 '사람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김 교수는 "만일 정부가 말기 암환자에게 1억5,000만원의 치료비용을 지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내 치료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면, 그 돈을 온전히 약물치료에만 사용할 환자가 얼마나 될까"라고 반문하며 "임종기에 가까워질수록 돌봄에 대한 지원이 절실한데, 정부는 약물치료에 돈을 다 쓰고 돌봄에 대한 책임은 환자 가정에 전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도 비판했다.

김 교수는 "거동이 불편한 말기 암환자에게 한달 간병비가 300만원 정도 든다. 일년이면 3,600만원이다. 간병인을 써야 누군가는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 현재로써는 이 돌봄의 책임이 온전히 가족에게 있다. 그럼 간병비에 대한 재정 지원이 항암치료 비용에 대한 지원보다 못한가"라고 기자에게 되묻기도 했다.

김 교수는 완화의료를 통한 암환자의 자기결정권이 개인의 혜택을 넘어 의료재정 절감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한국은 가족 중심의 사회이고, 돌봄에 대한 책임이 가족에게 전가돼 있는 만큼 암 환자 역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일례로 한국의 암 환자들은 끝까지 항암치료를 받는 것으로 유명한데, 자식이나 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죽을 때까지 고통스런 치료를 지속하는 것"이라며 궁극적으로는 완화의료가 약물치료 비용 절감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결정도 마찬가지"라며 "결정을 미루다 악화돼 응급실로 실려와 인공호흡기를 달게 되는 환자가 허다한데, 이런 말기 암 환자가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회복해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되나. 이런 환자들이 중환자실을 메우고 있으니, 정작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한 환자들은 길바닥이나 앰뷸런스에서 죽어나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환자실을 한번 경험한 환자들은 연명치료에 대한 거부가 상당하다. '사람이 못할 짓'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라면서 "애초에 완화치료팀 상담을 통해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면, 환자도 고통 끝에 돌아가시는 일이 없을 뿐더러 중환자실 병상 문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건비 개념 없는 현 수가 체계에선 요원" 한숨

하지만 완화치료가 암 치료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관련 수가 책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일단 우리나라 의료는 인건비에 대한 개념이 없다"며 "의사가 환자에게 5분을 설명하든 1시간을 설명하든 수가 자체가 인정되질 않는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병원은 검사나 약물 처방을 통해 인건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완화치료에는 약물치료도 물론 포함이 되지만 대부분이 사람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일"이라며 "지금처럼 돌봄에 대한 평가절하가 지속되고, 인건비 개념이 없는 수가 체계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완화치료는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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