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디에고에서 개최된 미국혈액학회 연례학술대회(ASH 2023)에선 전세계 혈액학 전문가들의 최대 학술 행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혈액질환과 관련된 최신의 치료법들이 대거 발표됐다. 그 중에서도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분야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chronic myeloid leukemia, CML) 관련 내용이었다.

CML은 2001년 최초의 표적항암제 '글리벡(성분명 이매티닙)'이 탄생한 이래 4세대 약제까지 개발되며 화학요법과 이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평생 복용해야 할 것 같던 약으로부터도 해방될 가능성까지 엿보인다. '무치료관해(treatment free remission, TFR)' 달성의 핵심은 빠르게 깊은 분자학적 반응(Deep Molecular Responses, DMR)을 유도하고 오랜 기간 이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이번 학회에서도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치료법이 연구돼 발표됐다.

연구에 쓰인 약제와 디자인은 다양했지만, 요지는 하나였다. 기존 CML 치료가 티로신키이나제 억제제(TKI) 단독요법이 기본이었다면, 앞으로는 TKI를 활용한 순차치료(Sequencing therapy) 전략이나 서로 다른 기전의 TKI를 조합한 병용치료(Combination therapy) 전략으로 나아갈 것이란 사실이다. 환자 개인의 상태와 치료제가 가진 효능 및 안전성 프로파일이 각기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CML 치료는 약제를 선택하고 조절하는 의사의 재량이 더욱 중요해지며, CML 치료에서 중요한 화두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전문가의 재량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급여제도 하에서 과연 환자들이 이러한 이상적인 치료를 받는 게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기자가 접한 한 삭감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 7월 국내에서는 CML 환자 치료에 4세대 표적항암제인 '셈블릭스(성분명 애시미닙)'가 급여 적용됐다. 이전에 2가지 이상의 TKI를 사용한 환자에서 3차 이상 약제로 급여 사용토록 허한 것이다. 급여가 허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셈블릭스 삭감 이슈가 발생했다.

삭감 사례 환자는 '완전분자반응(complete molecular response, CMR)', 즉 PCR 검사에서 BCR-ABL 유전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의아했다. TFR 달성이 CML 치료의 장기 목표라면, CMR 혹은 DMR 달성은 단기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환자에게서 하루빨리 CMR 혹은 DMR 달성하고 이를 충분히 오래 유지해야 궁극적으로 약을 중단하는 TFR 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약을 끊고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TFR 달성은 비단 환자 개인에게만의 최상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나라 정부에게도 마찬가지다. 환자 1인당 한 달에 수백만원에 달하는 약제비가 절감되니, 재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CMR을 달성했는데 삭감을 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삭감 이유는 '돌연변이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셈블릭스는 'T315I' 또는 'V299L' 변이가 없는 경우에 한해 급여가 인정되는데, 이를 검사하지 않고 약을 썼다는 게 이유였다.

일반적으로 'T315I'와 'V299L' 변이는 TKI에 대한 내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T315I'와 'V299L' 변이가 있는 환자들은 TKI 치료 저항성이 높은 환자로 보고 '포나티닙'이라는 좀 더 강력한 3세대 약제를 쓰도록 하고 있다. 앞선 약제에 치료 실패한 환자에서 'T315I'와 'V299L' 변이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번에 삭감 사례의 환자는 셈블릭스로 약을 교체하게 된 원인이 '부작용' 때문이었다. 내성이 생겨 앞선 치료제에 치료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치료 반응은 좋았지만 부작용으로 인해 기존 약물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내성 발생을 의심할 상황이 아니기에 당연히 불필요한 돌연변이 검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셈블릭스의 급여기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삭감을 통보했다. CML의 병태 생리를 이해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개발된 CML 치료제들은 저마다 부작용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관상동맥을 막거나 뇌혈관 질환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약제에 따라 혈당이나 콜레스테롤, 혈압을 높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치료가 장기화 될수록 혈관 부작용 이슈가 중요하며, 의사는 환자의 혈당이나 콜레스테롤, 혈압을 적절히 조절하고 이를 위해 약의 용량을 감량하거나 필요하다면 약을 교체하기도 한다.

즉, 이번 삭감 사례에서 셈블릭스로의 교체는 환자의 부작용으로 인해 필요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환자에게서 CMR 달성이라는 최상의 결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심평원은 왜 불필요한 검사를 하지 않았냐 종용하는 꼴이 돼 버렸다. 이제부터 셈블릭스를 처방할 땐 원인이 약물 부작용이라 해도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게서처럼 반드시 내성 변이 검사를 해야 급여를 인정하겠단 말이나 다름없다. 환자들은 2주나 걸리는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고, 또 불필요한 검사에 재정이 소모됨에도 말이다.

결국 이번 삭감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진행된 심사의 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심평원이 점점 고도화되고 있는 암 치료의 전문성을 감안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재량을 허용하지 않은 채 현재와 같이 획일화되고 경직된 심사 방식을 고수한다면, 국내 환자들이 발달된 최신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점점 늦춰질 것이며 또한 건보재정 누수도 불가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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