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숙 이샘병원 산부인과 진료과장

뜬금없이 예전 바티칸 여행 때 봤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가 떠올랐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보면 훨씬 편하게 볼 수 있었겠는데. 근데 대기실부터 수술방까지 거리가 이렇게 멀었나. 휙휙 지나가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나 걸어갈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침대차에 실려 드디어 도착한 2번 수술방은 서늘하고 다소 어두웠다. 내가 집도 할 때는 느끼지 못하던 냉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같은 수술 방 온도라도 의사와 환자가 느끼는 온도차가 이러했던 것인가. 그러나 지난 약 두 달 간의 고뇌는 이미 끝나 마음은 편안했다. 동시에 아내를 수술 할 집도의 남편이 느낄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힘듦에 진심 동정을 느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 (사진출처: 게티이미지)

대기실부터 도합 5번째의 환자 확인, 즉 ‘sign in’ 을 마지막으로 마취를 시작한다고 했다. 수면 유도제가 들어가자 목에서 약냄새가 훅 나더니, 마치 소주 한 병쯤 마신 듯 몽롱해졌다. 점점 눈꺼풀을 들고 있을 수 없게 되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젯밤 시간마다, 나중에는 분마다 깨어나서 잠을 설쳤던 게 기억났다. 이제 좀 잘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유난히 더웠던 8월초 저녁 – 그 날 남편은 저녁을 먹자마자 내 골반 MRI 소견에 난관암이 의심된다고 하였다. 갱년기 증상으로 여겨지는 생리불순과 부정출혈이 원래 가지고 있던 근종과 연관성이 있는지 검사 해 본 것이었다. 나름대로는 초음파 검사를 꾸준히 해 온 터라 뭔가 잘못 된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암이 의심되니 수없이 많은 추가 검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전까지의 동료였던 의료진 앞에서 발가벗겨졌고 몸 안으론 각종 의료 기구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혈관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터지고 멍들었다. 정밀 검사를 하면서 의사로서는 알 수 없었던 환자들의 고통을 또 하나 알게 되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으면 병원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굴욕적인 검사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정밀 검사에서도 역시나 골반 쪽에 암이 의심된다 했다. 이젠 상태를 알기 위해선 배를 열어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내가 상당히 쿨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급 상황이 되자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극명한 것은 흉터 문제에서 드러났다. 의사로서의 내 입장은 확고했다. 살 수 있다면 흉터가 뭐가 문제인가.

환자나 지인이 수술시 흉터를 문제 삼으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인암은 복강 내부를 완전히 드러내고 암세포까지 최대한 없애 주는 것이 생존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임파선에 전이가 되었는지도 치료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암의 상태가 심각할수록 복부의 흉터는 더욱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근데 내가 막상 환자가 되자 우선적으로 가장 연연한 것은 흉터였다.

남편은 시원스럽게 절개하고 깨끗하게 수술 하자며 흉터를 누가 보느냐고 했지만,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뭣보다 나는 20년 넘게 부인과 환자를 봐왔다. 암 수술 후 그녀들의 흉터가 어떠한지 안다. 나는 절대로 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수술 전에는 흉터에 대한 것은 마음을 비웠다. 사는 게 중요하지 흉터가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환자들이 이렇게 한 가지씩 포기하는구나 싶었다. 처음엔 흉터를, 다음엔 해 오던 일을, 종국에는 아파서 마약성 진통제로 연명하더라도 살아서 애들이 크는 걸 조금만 더 볼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아무튼 나의 경우엔 진단적 복강경을 시행 후 배 안의 상태에 따라 배의 절개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남편에게 딱 봐서 암이면 시원스럽게 배꼽 위까지 절개하라고 했다. 그러나 만약 수술 중 임시 조직검사에서 암이 아니거나 아주 초기이면 적은 절개로도 수술이 가능할 것이었다. 수술 방법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능성은 적지만 양성이라면 이후 치료의 예후는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결정하고, 힘들게 수술을 하는 것은 남편의 몫이었다.

일주일 중 쉬는 날에만 검사를 진행 하면서도 나머지 날은 평소와 똑같이 병원에서 일을 했다. 수술을 하고 나면 당분간 일을 쉴 생각이었기에 모든 일상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해마다 돌아오던 독감 예방접종 공고가 뜨자, 이마저도 내겐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침마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의료기구들을 챙기고, 커피를 내리는 일상들이 신선해 보였다. 그리고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이 모든 루틴을 아무 생각 없이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는 직원들이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르는 환자들을 대할 때도 기분이 묘했다. 단골 환자나 산모를 볼 때는 특히 더 그랬다. 시간을 내어 좀 더 설명해주고, 인계장도 열심히 썼다. 그나마도 이렇게 진료를 보는 일상생활에서는 내 개인적인 사건은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내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태풍속의 조각배처럼 요동을 쳤다. 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 긍정적인 기분일 때도 많았다. 처음에는 울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물이 한 번 쏟아지니 수시로 터졌다. 밥 먹다가도, 샤워 하다가도, 책 보다가도 울었다. 마치 눈물이 습관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암 진단을 받고 지나갔던 환자들과 친구들이 떠올랐다. 나는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충격과 아픔이 어떠한지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그만하길, 또는 암초기에 잘 발견했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환자들에게 쉽게도 하였다. 당사자에겐 사실 그렇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신적 충격도 있지만, ‘병’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상을 파괴한다. 그걸 의사로서는 몰랐다.

마취 하고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해서 눈을 떴다. 꿈도 꾸지 않은 마취에서 깨어난 것이다. 남편이 보였다.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반복해서 내 귀에 들려준 말은 임시 조직검사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만세를 불렀고, 남편이 눈시울을 붉혔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들었다. 오로지 괜찮다는 말만 기억났다.

지난 두어 달 동안 내가 가장 들들 볶은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는 나를 수술 할 산부인과 의사면서 가족이었고, 나는 환자이자 산부인과 의사였다. 어쩌면 세상 가장 불편한 관계일 수 있었다.

내가 끊임없이 내 수술 방법을 시뮬레이션 했고, 내 마음대로 자꾸 수술 방법을 바꿨다. 수술 후 비뇨생식기 계통의 문제 등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작용을 해결하는 방법을 더 연구하라고 요구했다. 같이 의사였지만, 이제 한 명은 환자였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서운해서 물고 늘어져 그를 힘들게 했다. 수술 후 남편도 부인 종양 전문의로서 이번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에게도 이 사건은 좀 더 환자와 가족들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수술한 지 삼일 째인 지금도 나는 이 행운을 믿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영화 〈식스 센스〉에서처럼 이것이 내가 지어낸 현실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열어놓은 병실 창문으로 가을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오싹하다. 창문을 닫으려고 보니 이슬처럼 늦가을비가 난간에 초롱초롱 맺혀 있다. 차가운 공기는, 그러나 내 폐포를 하나하나 채우며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감사하다.

촉나라 말에 제갈공명은 하늘에 자신의 운명을 물은 뒤, 자신에게 더이상 여명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한탄했다.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는 천하를 통일 할 능력이 있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이 행운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세파에 휘둘리며 느슨해지는 의사로서의 소명을 잊지 말고 더욱 매진하라는 채찍질이 아닐까. 나는 하늘이 내게 다시 기회를 준 의미를 되새기며 내 인생의 이 사건을 뚝 떼어내어 가슴 한 쪽 구석에 걸어 놓고 두고두고 꺼내어 볼 것이다.

수상소감 박천숙 이샘병원 산부인과장
박천숙 이샘병원 산부인과장(왼쪽)
박천숙 이샘병원 산부인과장(왼쪽)

정말 오랜만에 온 가족이 20분쯤 거리의 광안리 바다로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갔어요. 연인과 강아지와, 친구들과 또는 잠이 덜 깬 아이들과 함께 하나 둘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며 딸아이가 신기해 했어요.

“해가 어리둥절 하겠다.” 하고 툭 던진 한 마디에 하하호호 하며 갈 때는 즐거웠죠. 근데 도중에 칠흑 같던 어둠은 이미 걷혔는데도 해가 예상 시간에 뜨지를 않는 거에요. 사람 구경도 시들하고 가는 동안 데워졌던 몸은 식어 추워지기 시작했지요.

“매일 뜨는 해인데 이게 뭔 유난이고.” 하며 돌아서서 가다가 그래도 아쉬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어요. 회백색 길고 두꺼운 장막 같은 구름의 한 가운데가 꼭두서니 빛깔로 익어 있은지는 꽤 되었는데, 마치 나올 듯 말 듯 하는 애기 때문에 난산을 겪는 산모 마냥 태양은 쉬 보이지를 않았어요.

그 때 갑자기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어요. 태양은 마치 이 시간을 지난 12시간 꼬박 기다렸다는 듯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을 내며 용트림 하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죠.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행복해하는 명배우처럼 조금도 어색해 하지 않고 스스로의 빛에 취한 듯이 멋지게 무대 위로 올라왔어요. 그 매끄러운 움직임과 아름다움이라니! 역시 우리의 태양이다 하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45억년전 지구의 탄생도 지켜보고 천년의 세월도 한 순간의 빛임을 알고 있는 태양이었죠! 그 자신도 언젠가는 소멸할 것을 알지만 인간의 한 생은 그에 비하면 찰라 임을 잘 알고 있는 그였어요. 하루쯤 좀 더 많은 인간이 지켜본다고 해서 흔들릴 리가 있겠습니까. 올해 소감은 태양의 빅 팬이 된 사연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양산 부산대학교 외과 박병수, 마취과 김희영 선생님, 국립 암센터 박상윤, 임명철 선생님, 서울아산병원 김소연, 박계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플 때 수술, 마취, 조언과 격려 해주셨습니다.

수술 해 주고 케어 해준 남편, 걱정 해준 양가 어머님들, 동서, 친구들 고마워요. 엄마가 아플 때 스스로 잘 알아서 공부하고, 엄마가 (아프다는 핑계로) 짜증 낼 때 이해해준 딸에게 특히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 글을 뽑아 주신 한미약품과 청년의사 신문, 그리고 심사위원님들께도 허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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