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호 경인지방병무청 소속 정신건강의학과 병역판정전담의

산발이 된 머리, 초점 없이 퀭한 눈, 삐죽삐죽 볼품없이 솟아나온 수염들. 아버지뻘 쯤 되는 남자가 면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색한 적막도 잠시, 그는 누군가가 앞에 앉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금세 상기된 목소리로 울음 섞인 한탄을 쏟아냈다.

대화라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몇 마디 채 나누기도 전에, 그가 왜 안정병동 안의 작은 면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딸이 며칠 전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크고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이 장례식에서 겪었던 일들에 관해서 설명하며,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메신저 프로필로 지정해뒀다며 내게 핸드폰을 건네 보여주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그새 프로필 사진을 바꿀 정신은 있었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딸과 있었던 일화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지만,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짐작할 때 평소 그와 딸의 사이는 그다지 가깝지는 않아 보였다. 그의 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딸의 장례를 마친 후 혼자 있는 시간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 스스로 안정병동에 입원했다고 했다.

그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병동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그와 면담하며 그가 감정을 느끼고, 처리하고, 표현하는 방식과 그의 삶에 대해서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드럼을 치는 연주가였는데 매우 감성적이었다. 또한 여태 내가 겪어왔던 환자 중에서도 감정표현이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편이었다.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중년의 노배우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쉴 틈 없이 내뱉는 극적인 언어의 홍수 속에서 딱히 어떠한 감정들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처한 딱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뿜어내는 것들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상실을 애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에 급급해 보였다.

어찌 됐든 나로서는 순간순간 그와 함께하며, 화려하게 겹겹이 포장되어있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숨겨진 진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입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쇄적인 안정병동에서 지내면서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미덥지 않은 인사를 남긴 채 그는 올 때와 같이 홀연히 퇴원했다.

그가 걱정스러웠지만 한 명이 떠나면 곧 두 명이 찾아오는 게 일상인 바쁜 전공의의 마음속에서 그에 대한 걱정을 오랫동안 잡아둘 수는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병동에서 보낸 시간이 안정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되고 면담을 통해 환기를 조금이나마 했길 바라며, 나의 손을 떠나간 환자들에게는 으레 “시간이 약”이길 기원하는데 이 옛말이 그에게도 작용할 것을 기도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을 즈음, 입원 환자 목록에 익숙한 이름이 추가되었다. 그는 지독한 복통과 구역감으로 인해 입원했다고 했다. 그는 소화불량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몇 달 사이에 체중이 10kg 넘게 감소했다.

우리 병원 정신과에 다시 입원하기 전까지 다른 종합병원의 내과를 전전하며 진료 받았지만 그의 통증은 CT나 내시경 등의 검사로는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소화불량이 마음의 병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뇌와 소화기관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밥을 먹다가 크게 화를 내면 체하기 십상이고, 만성적인 걱정과 불안을 호소하는 신경과민증 환자들이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것처럼, 소화기관은 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정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관이다.

그가 구역감이나, 소화불량 같은 여러 신체적 증상들을 호소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은 통증을 일으키곤 한다. 그는 줄곧 슬픔과 분노와 무기력감, 그리고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들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으리라.

그는 더 이상 면담 시간에 울부짖지 않았지만, 그의 슬픔은 어쩐지 전보다 더 처연해 보였다. 그가 호들갑스럽게 자신의 우려스러운 경제적인 상황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자신이 연주한 드럼 영상이라며 슬쩍 핸드폰을 건네 보여줄 때도, 그가 더 이상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통증이라는 언어를 매개 삼아 그의 감정이 나에게 더 잘 전달된 탓일까? 전보다 그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어쩌면 그는 나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느껴야 할지도 모른 채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넓은 공원 어딘가에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리고, 본인이 무슨 상황에 놓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주기만을 바라며 목놓아 울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저 마음 가득 덩어리인 채 꽉 차 있던 것들을 쏟아내기만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초보 치료자인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와 면담할 때면 나도 그와 똑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 것이었다.

사람이 압도적인 상황과 마주치게 되면, 그 순간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생각과 감정만을 가지고 아주 단편적인 기억을 구성해버리고는 한다. 그 조그만 파편 외에 자신의 이해 밖에 있는 ‘덩어리’들은 의식의 저편에 무겁게 자리한 채 마음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르게 처리되지 못하면, 결국 트라우마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가 겪은 상실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케세라 세라.

퇴원에 이르러 그가 종종 체념하듯 하던 말이었다. 한 달여간 입원 치료를 받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소화기 증상은 부분적으로 호전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 상처는 아직 충분히 아물지 않은 듯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의 상실에 대한 애도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했다.

그는 삶의 의욕도, 의지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말에 그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어색한 듯 고민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해서 설명했다.

한적한 교외에 이 층짜리 건물을 지어놓고, 1층에서는 카페나 음식점을 겸하며 심심할 때마다 홀에서 연주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정말 멋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케세라 세라, 어떻게든 될 대로 되겠죠.”라며 대답하던 그였다.

나는 한 번도 감히, 그에게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정신과 의사로서 수련 받으며 지식을 습득하고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상황에 익숙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상황에, 압도적인 감정을 맞닥뜨리면 자연스럽게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럴 땐 그저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내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그에게 더 잘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퇴원한 이후에도 종종 그가 외래를 잘 다니고 있는지 확인하곤 한다. 교수님 외래 진료를 봤다는 기록이 한 줄씩 추가될 때마다 또 한 달을 버텨낸 그가 대단하고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그가 안쓰럽다.

그가 자주 쓰던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는 영어로는 “Whatever will be, will be" 이며,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의 식으로 해석하면 일어날 일은 내가 무엇을 해도 일어날 테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적이고 수동적인 말이 되어 버린다.

반면 내 생각에 이 말은 미래에 대한 무책임한 방임이 아니라,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자신의 앞길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퇴원 말미에 그와 나눈 대화에서, 그는 이제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했다. 그의 인생에서 아직 이루어질 일들이 남아있음을 믿어본다. 어느 날씨 좋은 화창한 날, 한적한 교외의 카페에서 드럼을 치며 흥얼거리고 있을 그를 그려본다.

수상소감 장준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진료를 봤던 환자분들 중에 유독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던 분도 그중 하나입니다. 안쓰러운 마음 때문인지, 죄송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아직 모르는 마음 때문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래도록 곱씹어봐야겠지요.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신 게 벌써 4년 전인데, 요즘은 맛있는 거 실컷 드시고, 음악 활동도 즐기고 계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부족한 글에 상을 주신 한미수필문학상, 청년의사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제가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걸을 수 있게 지도해주신 한림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실의 교수님들, 우리 의국 동료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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