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매몰된” 한국 정부가 놓친 것들
日 지향하는 의료 맞춰 의사 수요 추계
10만 설문조사로 의사 일하는 방식 파악

일본이 의사 수급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방식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청년의사).
일본이 의사 수급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방식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청년의사).

정부는 의대 정원 증원 규모를 2,000명으로 공론화한 지 1시간 만에 확정, 발표했다. 2,000명이라는 숫자가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바로 계산이 나오는 산수”라고도 했다. 반면 일본은 6,200명이던 의대 정원을 9,403명으로 증원하는 데 50년 이상 걸렸다. 그만큼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은 의사 수급 정책을 수립할 때 추계 방법을 정교화하는 데 공을 들인다. 10만명이 참여하는 설문조사를 통해 의사가 일하는 방식을 파악하고 의사 편재 지표와 대책도 마련했다. 이로 인해 현장의 정책 수용성을 높였다.

대한의학회 이상규 기획조정이사(연세대 보건대학원장)는 대한의학회에 제출한 보고서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 진행 과정과 시사점’을 통해 후생노동성 산하 의사수급분과회의 논의 내용을 소개했다. 의사수급분과회의는 일본 의사 수급 논의와 정책 결정을 주도한다.

이 이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난 1970년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를 1980년까지 1.5명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의대가 없는 현에 의대를 신설했다. 1981년 의대 정원은 8,280명으로 늘었고 1983년에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1.5명이 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의사 과잉 공급이 예상됐다. ‘미래 의사 수급에 관한 검토위원회’는 1986년 향후 의사 과잉이 예상된다며 의대 정원 감축을 결정했다. 정원 감축도 점진적으로 진행돼 2003년까지 7,625명으로 655명 줄였다.

2005년에는 ‘의사 수급에 관한 검토회’에서 전체 의사 수는 부족하지 않지만 산과나 소아청소년과 등 특정 진료과와 특정 지역에는 의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신 의사 확보 종합대책’(2006년), ‘긴급 의사 확보 대책’(2007년)이 발표됐고 의사가 부족한 지역을 위한 지역정원제가 도입돼 의대 정원이 늘었다. 의대 정원은 2019년 9,420명으로 다시 늘었다. 하지만 검토회 산하 의사수급분과회가 오는 2028년이나 2033년경 의사 과잉 공급을 예측하면서 의대 정원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있다.

일본 의과대학 입학 정원 추이(자료: 일본의 의대 정원 증가와 지역 정원제. 국회도서관)
일본 의과대학 입학 정원 추이(자료: 일본의 의대 정원 증가와 지역 정원제. 국회도서관)

점진적 증원+실효성 높은 정책으로 수용성도 높여

일본은 의대 정원이 점진적으로 증원됐을 뿐 아니라 정교한 연구를 통해 의사 수급 추계 정확도를 높이고 지역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등 실효성을 높인 정책이 함께 추진됐다는 게 이 이사의 설명이다. 이를 통해 “정책의 수용성을 높였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의사가 지역에 머무르도록 지역의료지원센터 기능을 강화해 의사의 경력 형성을 지원하고 배치를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근무 환경 개선 지원센터’를 통해 의사가 적은 지역의 근무 환경을 정비하고 그 지역 근무 의사에게 제공되는 인센티브를 높이는 대책도 마련했다.

단순히 인구 대비 의사 수만 고려해 수급 정책을 수립하지도 않는다. 이 이사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연령 구성과 남녀 비율이 다르며 연령과 성별에 따라서 진료율은 차이가 있다”며 인구 대비 의사 수는 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본은 의료 수요, 인구 구성·변화, 의사편재 단위, 환자 유입·유출, 의사의 성별과 연령, 지역의 지리적 조건 등을 고려한 의사편재 지표도 개발해 의사가 다수인 지역과 소수인 지역을 설정한다.

지향하는 의료 토대로 미래 의사 수요 추계

지향하는 의료가 무엇인지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의사 수요를 추계한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의사수급분과회에서 “일본이 지향하는 의료 모습과 그 모습을 바탕으로 한 의사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와 10만명이 참여하는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또한 이를 토대로 일본 의료의 패러다임 전환이 제안됐다.

이 이사는 “인구 구성과 질병 구조 변화, 환자들의 기대 상승 등으로 인해서 수요 측면의 변화가 예상되고 여성 및 고령 의사의 증가, 의사들의 노동 방식 변화 등에 따라서 공급 측면의 변화도 예상됐다”며 “기술의 발전은 의료 현장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직종 간 협업의 가능성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예측”에 설문조사를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는 “일본이 지향하고자 하는 미래 의료의 모습에 대한 큰 그림을 우선 설정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았다. 이 이사는 “어떤 나라의 의사 숫자는 그 나라가 운영하는 의료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적정한 의사 수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향하는 의료체계에 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측면에서 숫자에 매몰돼 있는 현재의 우리 상황은 많은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공공 중심 의료체계인 나라에서는 의사가 공무원과 유사하며 많은 의사 인력을 필요로 하지만 한국과 일본처럼 민간 중심 의료체계에서는 의사의 생산성이 높아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도 의료체계가 유지되는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고 했다.

의사가 일하는 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10만명 설문조사를 실시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제안된 일본 의료의 패러다임 전환(출처: 대한의학회 E-뉴스레터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 진행 과정과 시사점’).
의사가 일하는 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10만명 설문조사를 실시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제안된 일본 의료의 패러다임 전환(출처: 대한의학회 E-뉴스레터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 진행 과정과 시사점’).

“급격한 변화가 한국 의료체계·문화 무너뜨리지 않을까 불안”

이 이사는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점진적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일본 의사수급분과회는 위원 22명 중 17명이 의사로 구성됐다.

이 이사는 “의료 전문가인 의사 중심 위원 구성은 마지막까지 유지됐으며 위원들 외에도 수많은 전문가를 참고인으로 회의에 참석시켜 다양한 의견을 듣도록 노력했다”며 “더욱 주목할 점은 6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지속적으로 자료를 검토하고 논의를 정교화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의사수급분과회가 진행한 모든 회의는 녹취 수준의 회의록과 의제, 관련 자료가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에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도 한국과 다르다.

이 이사는 “한 나라의 의료는 그 나라가 거쳐온 역사와 제도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은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의료를 이용하게 되기에 의료는 모든 국민과 연관된 문화이기도 하다”며 “문화를 바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데 작금의 급격한 변화가 우리나라가 의료보험제도 도입 이후 40여 년 동안 형성해 온 의료체계와 의료문화를 송두리째 무너뜨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출처: 대한의학회 이상규 기획조정이사의 E-뉴스레터 기고문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 진행 과정과 시사점’
출처: 대한의학회 이상규 기획조정이사의 E-뉴스레터 기고문 ‘일본의 의사 수급 정책 진행 과정과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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