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양대병원 이비인후과 김연수 교수

때론 의사라는 직업이 어떤 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전생에 우린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김신 마냥 칼에 수많은 피를 묻힌 장수가 아니었을까.

태생이 감정적인 인간이라, 환자의 죽음을 맞이할 때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벌써 15년은 된 일이지만, 인턴 때 첫 코드 블루가 떠서 달려가던 기억이 난다. 그 뛰어갈 때 처음에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가 된 것 같은 마음에 신이 나서 달려간다. 그게 정말 신이 난다기보다는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전속력으로 병원 내를 뛰어가겠나. 그러나 그렇게 CPR을 할 때면 그때의 그 공기는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그 순간에는 마치 중력이 두세 배는 되는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CPR은 환자를 살리기 위한 CPR이 아니다. 물론 CPR 이후에 의식이 돌아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필사적으로 CPR을 한다. 하지만 때로는 살리지 못하고 살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한다. 그때의 CPR은 뭐랄까... 돌아가시는 분의 저승길을 함께 걸어가는 느낌이다. CPR을 하고 있는 도중에 가족들은 주변에서 울고, 울다가 쓰러지고, 그 안에 있다 보면 내 압박의 순간순간이 떠나는 환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느낌인데, 환자는 내 손길에 잠시 혈색이 돌아오다가 다시 혈색이 사라지고 그렇게 점점 천천히 떠나가시는데 어느 순간에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CPR을 하면서 눈물이 차오르는 의사라니, 나는 내 감정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못난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고, 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 내가 환자를 살리기를 포기하는 의사가 되는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눈물관을 열어본다. 하지만 또르르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 환자는 아마 그 순간에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강을 넘어버리는 것 같다.

사실 인턴 때 마주하는 죽음들은 어쩌면 피상적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어떤 환자 A 가 돌아가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30분에서 한 시간 동안 서서히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그 죽음이라는 긴 순간을 온전히 느끼다 보면 순수하게 죽음에 대한 감정이 가득해진다. 그런 것이다.

그 이후 전공의 때 맞이하는 죽음은 이런 것이다. 내가 처음 신환 노트를 썼던 환자, 내가 수술 전 검사들을 맡겼던 환자, 가 수술 전 설명을 했던 환자, 그 수술 후 드레싱을 했던 환자, 이후 외래에 오고 어느 날 나와 즐겁게 대화도 했었던 그 환자가 암이 재발하고, 그 재발한 부위를 다시금 매일같이 드레싱하고, 어느새 환자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나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이 그저 매일 조금이라도 그 죽음을 붙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드레싱을 하고 손을 잡고 위로한다. 환자는 때론 조용히 숨을 거두지만, 두경부외과의 환자들은 어느 날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어느 날은 고통스럽게 호흡을 갈망하며 그렇게 떠나간다. 그때는 전공의로서는 너무나 무력하다. 이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몇 달간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안개 같은 죽음의 먹구름을 함께 바라본다. 뒷걸음쳐 보지만 도망갈 수가 없다. 죽음은 때론 이슬비처럼 때론 폭풍우처럼 다가온다. 환자는 속절없이 죽음에 젖어 드는데, 이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빗방울을 조금 덜 맞도록 우산을 씌워주는 일뿐이다.

사실 그 어떤 죽음도 절대로 무뎌지지 않는다. 그저 경험이 축적되며,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할 뿐이다. CPR에 달려가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 농담은 정말로 재미있는 농담이어서가 아니라, 그 죽음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있는 그저 힘껏 숨을 내뱉어 보는 것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죽음의 한가운데서 죽음의 눈빛을 잠시 피해서 딴청 하는 것이다. 그 죽음은 때론 나를 힐난하듯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 그저 환자가 폭풍우가 아닌 잔잔한 이슬비 같은 죽음으로 떠나갈 수 있도록 그 비바람 앞에서 등 돌려 환자의 죽음을 대신 맞아준다. 나는 죽지 않으니까.

그리고 두경부외과의가 된 다음, 수술한 환자가 재발했을 때, 혹은 합병증이 생겼을 때, 혹은 기도 폐색으로 응급실을 왔을 때, 죽음을 예상하고는 하는데, 이때는 나에게 드디어 수술 실력과 경험이라는 무기가 생겼기 때문에 이 죽음이라는 빗방울을 있는 힘껏 막아본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바들바들 떠는 환자에게 지팡이 마냥 지지대가 되어주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도 사실 너무나도 무섭다. 환자가 죽을 것을 알고 있을 때, 내가 내 손으로 환자를 놓아버려야 할 때, 그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술을 직접 하게 된 다음부터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수술하는 환자들에게 내 삶의 하루하루를 나누어 준다는 생각이 든다. 환자가 하루 더 살 수 있다면 나는 하루 덜 살아도 괜찮다는 듯.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45세 음주로 인한 중증 간경화증으로 도저히 수술할 수 없는 어떤 여자 설암 환자가 있었다. 우리는 고심 끝에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했는데, (항암도 할 수 없어서) 방사선 치료가 끝났을 때 환자는 금주를 하기도 하고 종양이 줄어들기도 해서 그런지 식사도 좀 잘 할 수 있게 되어서 컨디션도 좀 좋아지고 간경화 지수들도 좀 좋아졌다. 그러나 종양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환자의 입에서는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술 이외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고심 끝 수술을 해볼까 했는데 수혈을 하고 피검사를 했는데 혈소판은 3만으로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너무 위험해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 환자는 수술장에서 죽더라도 수술을 받겠다고, 어차피 죽는 거 아니냐며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몇 번을 용기를 내어 수술을 할까 고민했지만, 며칠간 고민 끝에 도저히 이건 수술할 수 없다고 결론이 났다. 그나마 이제는 약간 간수치가 좋아져서 항암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고 하여 보존적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종양내과에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힘내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다가 너무 바빠서 어느 금요일에 회진을 못 갔고,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환자를 보러 갔는데 환자가 나에게 말하길...

"교수님이 오셔서 힘이 나요. 교수님이 안 오셔서 너무 무서웠어요."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데, 내가 그렇게 오래 안 갔나 생각하니 하루 회진 안 간 것뿐인데 환자는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다. 사실 수술한 환자도 아니고, 결국 수술을 포기한 환자였기 때문에 그 과정이 나에게도 너무 힘들었다. 내가 수술을 포기하는 것이 환자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종의 죄책감도 들었다. 이 환자는 결국 힘들고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실 볼 때마다 너무 힘들다. 그래서 사실은 너무 자주 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환자가 내가 안 가서 그 하루가 너무 무서웠다는 말을 하자 더 깊은 반성과 다짐이 다시 생겼다. 이 환자는 폭풍우를 지나가고 있구나. 이 환자의 죽음에 가는 길에 내가 우산이 되어 줘야겠다. 매일 가서 오 분에서 십분 힘내라고 잘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내가 곁에 있다고 다독거린다. 사실 이 시간은 나에게도 큰 마음의 부담이다. 나도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괴롭다. 아무리 무뎌지려 해도 무뎌질 수 없다.

하지만 이 환자가 견디는 그 두려움에 손잡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한미약품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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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 건양대병원 김연수〉

어느새 두경부외과 전문의가 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막 의사 생활을 시작한 한 후배가 첫 CPR을 하며,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 생경해서 더욱 슬펐다며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15년 전 첫 CPR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가득 차오르는 눈물이 어딘지 모르게 의사 답지 못한 것 같아서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압박하면서 저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죽음이라는 사건은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똑같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을 겪으면 겪을수록 의사는 환자를 살리고 싶어서 손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환자가 죽음으로 걸어가는 길에 지팡이처럼, 죽음이라는 비를 함께 맞고 걸어가는 동반자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미수필문학상을 도전한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매해, 때 마다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기록으로 남기고, 한 해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그 환자들을 떠올리며 글을 다듬는 일을 해왔습니다. 지금껏 수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환자분들과의 추억을 깨끗한 빨래 개어 넣듯 곱게 개어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왔습니다. 어느새 이런 저만의 연례행사가 1년을 마무리하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되었고, 진료하는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어서 수상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 어떤 상보다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환자 한 명 한 명과의 기억들이 누적되어 그동안 쌓여온 감정을 글로 정리하고 나니, 내 앞에 이렇게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나이테처럼, 어느새 내가 단단해지며 성장하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네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저는 순간순간의 감정을 선명하게 보관하기 위해 글을 쓸 것입니다. 그리고 연말이 되면 한 해를 정리하며 환자분들과의 시간을 차곡차곡 보관하며 한미 수필문학상에 또다시 응모를 하겠지요. 저에게 소중한 이 시간들을 더욱더 의미 있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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