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미래아이여성병원 산부인과 박천숙

“네에? 제가 폐경이요? “
미경씨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미간과 이마에 슬픔이 깊이 패였다. 마스크에 갇혀 있던 세월의 흔적이, 그 어여쁜 얼굴에 일시에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40대 후반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였던 그녀는 갑자기 노파 같았다. 그리곤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내 진료실의 일상 시간을 멈춰버렸다.

폐경은 더이상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임신을 할 수 없고, 여성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식은땀과 수면장애, 감정기복 등의 전형적인 증상 이외에도 골다공증, 심혈관 질환의 위험이 높아진다. 많은 여성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이 새로운 변화에 심적으로 저항한다. 심한 우울증은 드물게 자살사고도 일으킨다. 내가 폐경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견고하고 무거운 고통의 벽이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쌌다. 답답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흐느끼는 미경씨를 바라보다가 문득 친구가 생각났다.

“미경씨, 제가 사랑하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내과 의사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소화가 안 되고 배가 불러와서 초음파를 해보니 복수가 차 있었고, 정밀 검사 결과 난소에 전이된 대장암 4기였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그때 친구의 나이 45세였다. 그녀의 친정 엄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나이였다. 친구도 이제 열심히 건강 검진을 해야지 하고 생각은 계속 해왔다. 그러나 너무 바빠 막상 본인의 몸을 살피는 일은 자꾸만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진단과 함께 친구의 투병 생활은 ‘밴드’라는 SNS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50회가 넘는 항암 치료 동안 그녀는 동기들에게 자신의 투병 생활을 생생히 전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주로 항암 치료 중 다른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과 기도문을 올렸다. 아픈 바람에 쉬어서 좋다며 사진 속에선 세상 가장 즐거운 사람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몸빼 바지에 수건을 머리에 두른 차림으로 산딸기를 따 먹거나 밤송이 까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투병 초기 1~2년 동안은 대진을 나가 내과 환자들을 치료했다. 힐링 센터에서는 다른 환자들의 의학적인 상담과 사소한 병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녀는 말기 암 환자가 되어서도 우리 동기 중 누구보다도 더 의사로서 열심이었다.

가끔 기적도 일어나지만, 대개의 암은 그 번식력이 무섭다. 3년이 지나자 항암제는 힘을 잃었고, 암세포가 직장 주변을 침범하여 장루를 만들어야 했다. 이때에 이르자 암성 통증은, 일은커녕 마지막 보루였던 그녀의 수면까지 앗아갔다. 소변이 안 나오고 폐에 물이 차고 빈혈이 심해 입원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대개의 임상적인 경과에 따라 우리 의사 동기들은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곧 그녀는 쓰러져 혼수상태가 지속되었는데, 놀랍게도 다시 일어났다. 2주 만이었다. 코에 호흡기를 단 상태로 활짝 웃는 사진이 기적을 증명하는 양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완치의 의지를 불태웠다.

‘완치’라... 친구는 상당히 똑똑한 내과 의사다. 말기 암인 자신이 완치되지 못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온갖 수치에 100%는 없다. 친구는 0.1%에 매달렸다. 그녀의 가슴은 그녀에게 채근했다. 넌 더 살아야 해. 딸들도 아직 네가 좀 더 필요해. 그리고 넌 지금껏 공부하고 일하느라 네 인생은 살아보지도 못했어. 친구는 죽어가면서 그러나 살고 싶어 했다. 늙어가고 싶어 했다. 마약성 진통제로도 조절이 안 되는 통증도 그녀는 살아만 있을 수 있다면 감내할 수 있다고 했다.

두 번째로 그녀가 쓰러졌다. 이번엔 간전이로 인해 복수 찬 것처럼 배가 불러왔고, 먹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물도 먹을 수가 없었다.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이 덮쳐 마약성 진통제의 용량을 계속해서 올려야 했다. 그로 인해 거의 의식이 없다가 한참만에 깨어난 친구가 여느 때처럼 SNS에 기도를 부탁하는 글을 올렸다. 먹을 수 있도록, 걸을 수 있도록, 그리고 코로나 걸리면 치료를 못 하니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 여느 때처럼 웃으며 올린 사진 속 얼굴이, 그녀의 마음과 달리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집착을 질투라도 하듯 바투 다가선 죽음의 사자가 친구의 얼굴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친구는 세 번째로 쓰러졌어요. 우린 그녀가 이전처럼 또 웃으며 일어나길 기다렸어요.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이번엔 일어나지 못했답니다.“

나는 환자에게 늙어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의사 친구의 처절한 4년간의 투병 이야기를 마쳤다. 두 뺨을 당겨 내리며 심술을 부리던 공기가, 누군가 달래고 어루만져 주기라도 한 듯 두둥실 떠올랐다.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 새 미경씨는 울음을 그치고 내가 건네준 화장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으니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조화로와 미모가 더 도드라졌다. 다만 반복해서 생겼음이 분명한, 울면서 드러난 얼굴의 여러 선들이, 그녀의 굴곡진 인생행로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드러난 감정이 부끄러운 듯 다시 마스크를 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경이…너무 당황스럽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받아들여야 되겠죠?“

피를 쏟아내는 초경의 놀라움도 컸고, 그것이 비록 건강과 출산의 보증이라곤 해도 귀찮고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30년 넘게 하다 보니 이젠 그 불편함에 길들여져 버렸다. 게다가 월경이 끝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노화이다. 여성성의 끝이다. 제아무리 성형외과나 피부과가 뛰어나도 나이를 되돌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말기 암 친구에게 노화는 끝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해 온 삶만큼 우리가 길들여진 게 또 있을까. 그 삶에서 추방된다는 것만큼의 고통은 세상에 없었다. 천국의 약속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폐경을 경험하고, 늙어가면서 고장 난 장기들을 고쳐가며 살고 싶었다. 살아만 있다면 약을 한 주먹씩 먹는다고 그게 뭐 대수인가. 속 썩이는 딸들이 자라면서 겪을 인생의 다양한 경험에 조언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귀여운 손주도 안아보고 싶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들꽃의 아름다운 생명력에 감탄할 수 있을 만큼 늙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기암을 진단받지 않았기에 미경씨는 결코 친구의 그 삶에 대한 열망을 온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미경씨의 인생에 어떤 고통이 있었기에 폐경이 그토록 그녀를 오열하게 했는지 나도 역시 모른다. 폐경을 머리로는 받아들인다 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긴 당장은 힘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담을 마친 후 미경씨는 훨씬 안정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폐경으로 인해 잃는 것 대신에, 삶으로 인해 얻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를 빌었다. 그렇게 미경씨는 내 진료실을 뒤로하고 자신의 삶 속으로 다시 걸어 나갔다.

<수상소감 - 하단미래아이여성병원 박천숙>

초음파를 보다가 건강하고 표준적인 모양을 가진 자궁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이쁘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기뻐하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모르긴 해도 밖에서 보이지 않는 장기 중에 이쁘다고 한다고 좋아할 장기는 잘 없지 않을까 싶어요. 게다가 자궁은 세포 하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신비한 장기입니다. 20년 넘게 보아도 항상 경이로워요. 이처럼 여자들은 골반 깊숙이 있는 이 장기와 자신도 모르게 교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폐경이 가히 반갑지는 않습니다.

친구가 그렇게 된 지가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5월, 기적 같은 치열한 4년간의 투병을 접고 벚꽃이 바람에 날리듯 그녀는 그렇게 갔습니다. 어떤 진단에 환자들이 겁을 먹거나 힘들어하면 나는 더 힘든 사람 얘기를 해서 그래도 당신은 괜찮다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힘들 때마다 저 스스로에게 쓰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우리 환자들은 자신과 같은 나이에 말기암 진단을 받은 의사 얘기에 위안을 얻습니다. 그렇게 내 친구 미라는 천국에 가서도 내 진료실에서 환자분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네요.

항상 곁에 있어주는 사랑하는 남편(글 제목은 남편이 정해줬어요), 2% 부족한 엄마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예쁜 딸, 어쭙잖은 본인을 격려해 주는 친구들과 청년의사, 한미약품,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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