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케어클리닉 유은혜 

진료실이 벌컥 열리며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들어왔다. 아기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기 아빠는 아기를 아기띠에 매고 들어왔는데 두 사람 다 잠옷에 가까운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아기가 향수를 먹은 것 같아요.”

엄마가 울면서 떨리는 손으로 내민 것은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샘플 향수병이었다. 연한 핑크색의 향수가 가득 들어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곧장 아빠 품의 아기를 쳐다봤다. 막 10개월이 된 여자 아기는 별을 빼다 박은 듯 반짝이는 눈으로 내 목에 걸린 연두색 청진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향수병의 뚜껑을 열어보니 상큼한 꽃향기가 났다. 과연 호기심 많은 아기라면 한 번쯤 혀를 대어보고 싶은 향이었다.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아기가 향수병을 들고 있었는데, 뚜껑이 열려 있었고 입 주변에서 향기가 났다고 했다. 병에 거의 가득 들어있는 상태로 내 손에 들어왔으니 정말 먹긴 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아기는 그렇게 현장에서 검거되어 진료실로 당장에 연행된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와 대화하는 사이에도 꾸준히 내 목의 청진기만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는 아기의 손에, 알코올 솜으로 한 번 더 소독한 청진기 한 쪽을 가져다 대자 덥석 잡으려 들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재빠른지 하마터면 청진기를 정말 뺏길 뻔했다. 반응 속도와 근육의 운동능력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호흡음이나 목 안쪽도 정상이었다. 부모의 말대로 입 주변에서 지나치게 좋은 향기가 나는 것만 빼면.

다행히 이 날쌔고 호기심 많은 아기가 입을 댄 향수에는 크게 위험한 성분이 없었고, 진료 당시 상태도 양호하며 나중에 응가에서 꽃향기만 조금 날 것 같다고 농담을 하자, 엄마는 그제야 눈물을 멈췄다. 밤새 구토나 설사, 의식이 처지는 증상 등이 나타나지 않는지를 관찰하도록 설명한 후 귀가하도록 했다. 그렇게 아이의 가족은 향기만 남기고 진료실을 떠났다.

가족이 떠나고 차트를 정리하다 말고 문득 인턴 시절이 떠올랐다. 응급실 당직을 서다 보면 만나는 가장 난감한 케이스 중 하나였던, 아무런 증상은 없지만 너무 운다는 이유로 응급실을 찾은 아기와 부모들의 엉망진창의 몰골.

극악의 업무강도에 시달리다 새벽 3시가 넘어 겨우 선잠이 들려고 하는 그 찰나에 꼭 들이닥치곤 했기에, 천근만근의 몸을 질질 끌고 나가며 아기가 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속으로 툴툴거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제는 안다.

울다 울다 목이 쉬어 쇳소리가 나고 얼굴도 터질 듯 시뻘게져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부모는 안았다, 업었다, 유모차에 태웠다, 젖병을 물렸다, 별짓을 다 해가며 진땀을 흘리고 난 후에도, 고민에 고민을 수백 번 반복한 끝에 응급실로 향했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그들이 응급실에 당도한 시각이 새벽 3시가 되는 이유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정말 야속하게도 막상 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하면 아기는 열에 일곱 정도는 엄마 품에 잠들어 있다. 부모도 의사도 민망해지는 그 순간에 아기는 거짓말처럼 숙면 모드다.

아무것도 모르던 인턴 시절엔 부모가 유난스러워 이렇게 잠만 잘 자는 아이를 이렇게 득달같이 데려왔나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동차의 일정한 소음과 진동이 마법의 꿀잠 유도제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엄마 아빠도 엄마 아빠가 처음이라 정말이지 모든 게 낯설고 두렵다는 사실을, 이제야 직접 체험하면서 이해하는 중이다.

유난스러운 ‘맘충’이라는 단어가 가진 폭력성이 얼마나 많은 부모를 이유 있는 불안으로부터 위축시키는지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의사는 하루에도 진료실에서 수십 명씩 환자를 만나기 때문에 그들의 불안에 필연적으로 무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더욱 타인의 불안을 이해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동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자와 보호자의 있는 불안에 공감하고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근거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진정한 진료의 범위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 본다.

엄마도 처음이지만 의사도 처음이라 이렇게 중요한 것을 이렇게 천천히 배워가는 게, 참 죄스럽다. 향수를 먹었던 아기는 몇 달 후,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다시 내원했다. 아기 응가에서 꽃향기가 났었냐고 묻자 엄마는 빵 터져서 웃었다. 당연히 그 순간에도 아기는 내 연두색 청진기를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한미약품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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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 웰케어클리닉 유은혜>

의사란 직업이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이상한 직업인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우리가 맞이하는 불행은 대부분 지독하게 우연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아무런 설명도 부여받지 못 한 채 죽음을 향한 가속 페달을 밟게 됩니다. 이것은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당연한 일이지요. 우주는 지금도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며 끝없이 종말을 향해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잔인한 우주에서, 하나의 생명체를 죽음으로부터 꾸역꾸역 건강한 삶이라는 임의의 상태로 되돌리려 노력하는 의사라는 직업은, 정말 얼마나 이상한 직업인가요? 어쩌면 가장 순리에 어긋나는 직업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비록 이해는 잘 안되지만) 양자역학과 다중우주의 관점을 좋아합니다. 존재란 내 곁에 무언가와 상호 작용할 때 비로소 실존이 결정되고, 그 확률에 따라 수많은 다중우주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는, 잔인하도록 무심한 우주에서 의사가 무기력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직업윤리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진료실에서 환자들과 만나 보내는 그 짧은 시간은, 환자의 우주와 나의 우주가 우연히 만나 중첩된 찰나입니다. 그 찰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희박한 확률로 우리 앞에 나타났고, 서로의 우주를 영원히 바꿔놓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찰나에게 우리가 조금만 더 다정할 수 있다면, 그 다정함이 미시적으로든 거시적으로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조차 우리를 역설적으로 해방시키고 또 충만하게 해줄 것입니다.

환자와의 기억을 글로 쓴다는 것 역시 그런 다정함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 다정함이 무뎌지지 않길 바라며 끊임없이 쓰겠습니다.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제 우주의 찰나들을 가장 빛나는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주는 가족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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