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븐리병원 내과 박진선 과장

나는 어린 시절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다. 나는 늘 도심 한복판 속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 주변을 기웃대는 길고양이들을 간혹 마주쳤지만, 엄마가 더럽다고 근처에도 못 가게 하셨다. 엄마 말씀만 믿고, 위험한 생명체인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자란 내가 의대를 다니고,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내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고양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환자에 관심을 두기에도 늘 바빴고, 주변에 고양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심각한 고양이 애호가인 남편을 만나고 나서, 나이 서른 중반 이후에 비로소 고양이라는 생명체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결혼 직후부터 남편은 고양이를 입양해서 키우자고 졸라댔다. 하지만 생명을 거두는 일의 무게는 일반인과 의사의 입장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어리고 예쁜 시절이 지나고 나서, 늙고 병들고, 먼저 고양이 별로 떠나보내는 일까지, 오 년이라는 시간을 공부하고, 고민하고, 망설였다. 그러다 올해 가을, 그것도 마침 내 생일날 저녁, 우여곡절 끝에 어린 남매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남매 고양이 중 암컷 아이는 처음부터 수컷보다 체구가 많이 작고, 목소리도 작았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총 열 세 마리의 동배 자식들 중 열 마리를 생존시켰고, 끝까지 분양가지 못하고 남은 세 남매 중 두 아이를 내가 데려왔다. 아무리 동물이라도 열 마리를 한 태에 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아마도 미숙아로 작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나 활발하고 눈부신 생명력에 반해서 긴 고민 없이 품게 되었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인 유자 하이볼을 따서, 유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태어난 지 육 개월이 조금 넘은 고양이들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사고뭉치에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너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함께 공간을 공유하면서 지켰으면 하는 아주 사소한 규칙조차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일방적인 배려와 무조건적인 애정만이 가능한 관계에 조금씩 익숙해져갈 때쯤, 중성화 수술을 시켜야 했다.

모든 산모들이 아이를 낳지만, 그렇다고 출산이 그다지 안전하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모든 반려 동물들이 건강을 위해 중성화 수술을 필수적으로 하지만, 이 역시 그다지 간단한 수술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수소문하고, 신중한 고민 끝에 병원을 정했다. 그리고 더 신중히 고민해서 수술 날짜를 정했다. 이 작은 생명체를 수술시킬 생각에 일주일 전부터 매우 심란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마지못해 유자를 병원에 맡기고 왔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려 집에 돌아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수술이 잘 끝났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비로소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고, 두 시간쯤 지나서 유자를 집에 데리고 왔다.

유자는 졸려 보였고,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쓰러워서 푹 자라고 집에 오자마자 이불에 돌돌 말아 눕혀 놓았다. 한참이 지나도 유자는 미동도 없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이제는 깨워서 뭐라도 먹여야지 싶어서 억지로 일으켰는데, 유자가 힘없이 쓰러졌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멍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아직 마취가 덜 풀렸나 싶어서 한숨 더 자라고 눕혔고, 유자는 기력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날 새벽, 걱정으로 잠을 설치다 일어나 보니 유자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 유자 이제 괜찮나 싶었는데, 유자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부랴부랴 집에 있던 펜 라이트로 동공 반사를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동공 크기는 변화가 있었지만, 유자는 눈앞에 바짝 다가온 물체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리 유자는 두 눈 모두 시력을 잃었다.

수의학 자체가 의학에 바탕을 둔다. 아직까지 동물만을 위한 검사, 진단, 치료약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 현상을 진단하고, 치료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인데 솔직히 너무 막막했다. 수의학 논문도 찾아보았지만 국내에 겨우 한 사례, 전 세계적으로도 몇 개 보고된 바가 없는 희귀한 경우라고 한다. 여기저기 동물 병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속 시원한 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왜 시력이 없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어떤 치료를 해야 하고, 얼마만큼의 확률로 시력이 돌아올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하니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늘 내가 주치의였고, 내가 주치의면서 동시에 보호자였고, 내가 보호자일 때조차 내 환자의 모든 경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이미 과정과 결과를 수긍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보호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의사를 마주하고,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어떤 말 한 마디에 마음이 하늘을 날았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는지 전혀 몰랐다.

나는 내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이해하기 쉽게, 장황하지 않게 환자들에게 설명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늘 칼같이 잘라왔다. 점점 의료 소송이 많아지고 있는 삭막한 의료계에서 나도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책임질 수 없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신중히 걸렀다. 좋아진다는 말은 절대 함부로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는 별다른 문제 없이 회복하지만 경과를 끝까지 봐야 안다고 설명했고, 그건 사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너무나도 무력한 보호자의 입장이 되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 작은 고양이를 안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여기저기 절박하게 뛰어다닐 때, 나에게 하나님 같았던 한마디가 있었다. 본인이 봤던 경우에서는 모두 어느 정도 회복되긴 했다라고 말씀해주신 고양이 안과 전문 수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그 선생님이 본 경우가 몇이나 되는지,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 건지,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희망이고, 전부였다.

만약에 차라리 절대 시력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해줬다면,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고양이를 보살피는 법을 찾아서 집을 다 뜯어 고쳐서라도 유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에 회복에 일 년이 걸린다고 했다면, 기쁜 마음으로 365일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그 과정이 우리 유자에게 너무 고되고 힘들지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면서 함께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막막한 상황 속에서 의지할 곳이 하나 없었다. 모르는 것이 사실이니 모르겠다고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입장인 것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 지독하게 절망적이었다. 내 환자를 진료하면서도 틈틈이 눈물을 닦아야 했고, 괜히 내가 거둬서 이 어린 생명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남은 긴 생을 살아내야 하나 싶어서 너무나 아득해졌다.

악몽 같던 그날 밤 이후, 한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우리 유자는 이제 오른쪽 눈은 제법 잘 보인다. 왼쪽은 아직 시야가 좁은 듯싶지만, 그래도 잘 오르내리고, 여기저기 호기심 왕성하게 뛰어다닌다. 가끔 작은 간식은 잘 못 보고 냄새로 찾아 헤매는 모습이 보여서 집사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그래도 일상적인 생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매일매일 어린 고양이를 데리고 시력이 돌아왔는지, 얼마나 돌아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어려운 환자는 처음 마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과 전문의가 만나는 환자들은 늘 자기 발로 걸어서, 적어도 휠체어를 타고 내 진료실로 들어왔다. 어디가 아픈지, 언제부터 아픈지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고, 협조가 되지 않는 데다 그날 기분에 따라 변덕스럽기까지 한 환자는 처음이었다. 귀찮게 구는 집사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다니는 유자를 쫓아다니며 “보이면 꼬리를 들어 보세요” 외치던 순간을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

유자의 시선이 따라와 준 한날은 햇살이 눈부셨고, 유자의 시선이 멍하게 비껴간 한날은 하루 종일 귓가에 빗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눈떠서 출근하기 전까지 그리고 저녁에 퇴근하자마자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모든 관심은 유자의 시선 끝에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이제는 조금 과한 것 같다는 걱정과 민원들이 하나 둘 쌓여갈 때쯤부터 유자의 시선이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을 때는 무조건 손길을 피하며 겁내던 유자가 어느 날인가 또랑또랑한 예쁜 호박색 눈망울로 나를 똑바로 마주 봐줬을 때,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내 나이 마흔둘, 그중 6년은 의대생으로 15년은 의사로서 살았다.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을 매일 만나왔다. 검사 결과나 치료 예후를 설명하는 것은 끝없이 무수히 반복되는 내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게 될 내 일이다.

매일 위내시경을 하다 보면 조직 검사 하나가 나에게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불과했다. 당사자인 환자 입장에서는 뭔가 나쁜 소식이 오는 것은 아닐까 불안에 떨면서 잠 못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모양이 안 좋으면 몇 프로의 확률이라고 교과서에 적힌 대로 설명해 주긴 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준 적은 없었다. 괜찮을 것이라는 말 한마디가 가진 힘을 몰랐었기 때문이다.

매일 환자에게 증상을 묻고, 가족력을 묻고, 수술력을 묻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면서도 그 대답에만 귀를 기울였다.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답답했다. 대답을 생각하는 사이에 눈동자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표정이 어떤지, 목소리가 떨리는지, 자세가 어떤지는 신경 써서 관찰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때로는 말보다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지켜보면서 의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잊어버리고 계셔도 괜찮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해본다. 그 말 한마디에 얼굴이 확 환해져서 진료실을 나가는 환자를 보면서 이게 뭐라고 싶다. 그럭저럭 괜찮다고 대답하는 환자의 표정을 보면서 정말 괜찮은 것 맞느냐고 재차 물으면 사실은 별로 안 괜찮다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의과 대학 시절에 의사와 환자 관계 수업을 열심히 들었지만, 그럼에도 결코 배울 수 없던 것들을 내가 하나하나 겪어 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머리로 알던 것들을 가슴으로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유자의 예쁜 눈동자를 마주치다 보면 절대 다시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

<수상소감 - 해븐리병원 박진선>

수상 소감이라니 조금 아니 매우 어색하다. 사실 작년에도 한미 수필 한 번 도전해봤는데 깔끔하게 떨어졌었다. 심지어 그건 내가 아끼던 내과 의사로써 내 첫 환자 할머니 이야기였다. 내가 느끼는 포인트와 대중이 혹은 심사위원이 느끼는 포인트가 다른가보다고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는 응모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의사 생활을 10년 이상 하고 있지만 그 이상 큰 의미를 가진 환자는 내게 없기 때문이다. 의학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흔한 신파는 이미 내게는 별로 슬프지도 않은, 삶의 쓰지만 겸허히 받아들여야하는 한 부분일 뿐이다.

나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관종적인 욕구는 아니다. 그저 내 안에 쌓여서 굳어져 응어리가 져버릴까 두려운 감정들을 배설하는 과정에 가깝다. 별명이 시트콤녀가 될 만큼 다사다난한 일들이 늘 주변에 함께 한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 의사들보다 에피소드가 유난히 많은 파란만장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 지나고 나면 대부분 웃으며 풀어놓는 일화들이지만 막상 그 순간에는 대부분 웃을 수 없었다.

우리 유자의 이야기는 지나고 나서도 다시 생각하면 주책 맞게 눈물부터 차오르는 기억이다. 짧은 시간동안 너무 격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고, 그 감정들이 나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 가족과 주변 지인들까지도 삼켜버렸었다. 나이 마흔이 넘고 나서 어지간한 일에는 크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던 일상이 갑자기 엄청나게 슬펐다가 엄청나게 기뻤다가 널을 뛰었다.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격함이었고, 이러고 앞으로 남은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나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지나갔고, 지나가고 나니 애틋하고 소중하다.

우리 유자는 고양이라서 이 이야기를 여기다 보내도 될지 조차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또 떨어지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는 배짱으로 맘 편히 보냈다. 여기 응모한다 생각하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절제하고 다듬다보니 그 순간들이 조금 더 정제되어 내 안에 남는 느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렇게 또 수상작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 유자로 인해 내가 느꼈던 많은 감정과 생각들의 흐름을 함께 느끼며 따라가는 과정이 즐거우셨기를, 나름 읽어나가는 분에게도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를 감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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