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박의원 박희철 원장

원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양손에 짐을 들고 아내와 큰 길로 나섰다. 아내가 짐을 달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은 쿵쾅거렸다. 택시를 탔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창문만 바라봤다.

“멀리 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는 백미러를 보면서 웃는다. 택시는 곧 성수대교를 올라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나는 고혈압에 의한 만성신부전으로 진단을 받았다. 출근 중에 갑자기 숨이 차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며칠 후 병원에 입원을 했고 만성신부전으로 진단을 받았다. 그 후 5년 동안 남아 있는 신기능을 유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점점 신장기능은 나빠졌다. 신장내과 교수는 혈액투석을 권했으나 나는 동업하는 의사에게 책잡히기 싫었고, 조금이라도 진료에 지장을 덜 주면서 활동은 자유로운 복막투석을 선택했다. 2개월 전에 수술과 입원을 해야 된다고 동업하는 선배에게 말했을 때, 냉대와 도끼눈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될지 몰라 5년간 휴가도 없이 얼마나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말이다. 그냥 아픈 사람은 무조건 죄인이다.

택시는 언덕 위의 병원에 도착했다.

“연락 받고 왔는데요.”
“성함이?”

입원계 직원은 친절했지만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83병동에 입원하시면 됩니다.”
“예.”

입원장을 들고 병실로 올라갔다. 2년 전인가, 83병동을 퇴원하면서 ‘평생 이 병동에 오지 않을 거야‘ 라고 혼자서 약속했지만, 다시 입원하게 됐다. 이번이 마지막 입원이었으면 좋겠다. 83병동 간호사는 입원장을 확인하고 병실로 인도했다. 병동 끝의 2인실이 열흘 이상 내가 입원해야 하는 병실이다. 하루에 몇 번은 창밖으로 하늘을 봐야 그나마 답답하지 않을 것 같아 창가 쪽으로 자리를 배정받게 해달라고 했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내도 역시 미동 없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앞으로의 치료과정도 걱정이 되고 자기의 인생도 걱정되는 눈치였다.

5년 전, 평생 처음 입원을 했을 때, 너무 답답해서 눈물만 나왔다. 불안감과 패배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옆 침대의 대장암 말기 할아버지가 나의 모습을 비웃듯이 빤히 쳐다봤다. 눈앞에 슬픔이 닥치니 환자들의 슬픔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환자들을 잘 치료했고 그들을 위로해 주었지만, 그 위로가 진실 됐는지 의심스러웠다. 환자들이 나약해지고 힘들었을 때, 나는 그들의 하소연에 친절했지만 사무적으로 들었고 상투적인 위로만 늘어놓았었다.

오후 5시 30분쯤,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만 있는 병원 식사. 전공의 시절, 먹기 싫어했던 반찬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두 수저를 뜨고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왜 이걸 안 먹어. 이 맛있는 걸.”
“응, 식욕이 없네. 그리고 싫어하는 음식만 있어.”
“이런 음식이 몸에 좋은 음식이야.”
“그건 알지. 그냥 당신이 먹어.”

아내는 숟가락을 들어서 나머지 음식을 먹는다. 아내는 간병을 하면 잘 먹지를 않았다. 아내는 병원 식당에서 혼자서 밥 먹기를 싫어했고 그냥 빵조각만 먹었다. 그래서 음식이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조금만 먹고 나머지를 아내에게 먹인다. 식판을 반납해도 주치의가 병실에 오지 않는다. 할 일 없이 TV도 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침대 위 인터폰에서 연락이 왔다. 스테이션 한쪽에 레지던트 1년 차로 보이는 젊은 의사가 앉아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전공의 옆에 앉았다. 요즈음에는 청진이나 촉진도 없이 병력이나 증상에 대해 묻고 컴퓨터에 기입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치료방향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다.

“환자분! 일반외과 교수님에게 컨설트를 냈으니까. 교수님이 곧 오셔서 상태를 확인하고 수술을 하실 겁니다.”
“예. 그럼 수술을 전신마취로 하면 안 될까요? 아프다고 하던데요.”
“예?”

전공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슨 이런 수술을 전신마취를 합니까? 전신마취를 하려면 검사나 준비할 게 더 많아요.”

귀찮다는 말이다. 나도 전공의 때 복잡하게 여러 가지를 묻고 원하는 환자가 제일 싫었다. 내과 전공의도 별것도 아닌 수술을 더 힘들게 준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당하면 다르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덜 무서운 방법으로 치료를 받고 싶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교수님에게 한번 물어나 봐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병실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났다.

그동안 아파서 힘들었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게 하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또 아프다고 무시하는 눈초리도 보기 싫었다. 그러자 점차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환자진료도 더 진지해졌고 설명도 더 자세히 해 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크레아틴 수치에 따라 울고 웃었다. 잠들기 전에는 그냥 슬퍼서 눈물이 났고 아침에는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왔지만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아침 8시쯤 새 가운을 입은 젊은이가 병실을 방문했다. 가운에 이름만 적혀있는 의과대학 실습 학생이었다. 병실에 들어와서는 나의 이름을 부른다.

“예.”
“환자분! 몇 가지만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학생은 자기가 맡은 환자를 진찰하고 리포트를 제출하기 위해 내 앞에 서 있었다. 정말 오래된 일이지만 나도 새로 맞춘 흰 가운을 입고 으쓱거리면서 병실에 가서 문진도 하고 청진도 하면서 리포트를 썼다.

“언제부터 불편하셨어요?”
“특별한 증상은 없으세요?”

아마도 전공의가 쓴 차트의 내용을 보고 왔는지, 똑같은 내용을 또 물어본다. 나는 가능하면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만약에 퉁명스럽거나 무시를 하면 환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두서없이 질문을 한 실습생은 고맙다고 말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아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30년 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도 저 나이에는 웃음도 크게 웃었고 꿈과 희망이 있었다. 또 개똥철학에 심취하여 실체가 없는 이상과 현실에서 힘들어했다. 이제는 이상도, 꿈도 없고 빡빡한 현실과 아픈 몸뚱이만 남아있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창밖을 보았다. 여름의 더위가 창밖의 풍경을 점점 싱그럽게 변화를 시키고 있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전공의가 병실에 들어와서 의자를 한쪽으로 치운다. 곧 신장내과 교수가 들어왔고 이어서 학생들과 간호사가 들어와 병풍처럼 교수 뒤에 섰다. 학생 중에는 아침에 나에게 왔던 친구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 교수님.”

신장내과 교수는 후배지만 병원에서는 나는 그녀의 환자일 뿐이다.

“수술은 일반외과 교수님에게 컨설트를 냈으니까. 오셔서 스케줄을 잡아 주실 겁니다. 그리고 전신마취를 원하셨는데, 전신마취는 질환에 영향이 있으니 특별한 문제가 없으시면 부분마취로 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죠. 뭐.”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고개를 돌려서 학생들을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학생이 리포트 때문에 왔던 것 같은데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았습니다.”

그 젊은 실습생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 실습생이 계속 상태를 파악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는 오지 않았다.

회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키에 통통한 외모를 가진 젊은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일반외과 교수였다.

“환자분, 교수님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수술은 가능하면 빨리하려고 합니다. 아니면 내일 해 드릴까요?”
“가능하면 빨리해주세요.”
“예. 그럼 오늘 오후 2시에 스케줄을 잡아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금식해 주세요.”

오후 1시 40분이 되자 간호사가 들어와서 수액을 바꿔달고 배의 털도 깎았다. 배에 원래 털이 없는데도 깎았다.

“자, 이제 수술실로 가실게요.”

이송반 아저씨가 침대를 끌고는 수술실로 내려간다. 아내는 침대 옆에 있었다. 천정이 움직인다. 나는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천장도,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빛도 싫어 담요로 눈을 가렸다. 엘리베이터에 태워진 나는 F층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의 문이 열렸고 천장의 움직임이 잠시 후 멈췄다. 나는 회복실에 누워있었다. 옛날 전공의 시절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일반외과 선생님이 옆에 와서 차트를 들여다본다.

“자! 환자분, 수술실이 준비되는 데로 들어갈 겁니다. 누워서 잠시 쉬시고 긴장 푸시고요.”

긴장이 많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포기도 됐다. 누워서 천장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귀에는 수술실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들렸다. ‘침대 끄는 소리’, ‘EKG 모니터 소리’, ‘슬리퍼 발자국 소리’등, 모든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잠시 후 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환자분, 이쪽 침대로 이동해 주세요.”

침대에서 수술대로 이동했다. 무영등이 켜지고 가슴에 EKG 모니터가 달렸다. 일반외과 교수가 다가왔다.

“선생님 조금 차갑습니다.”

배 위에 소독을 하고 수술포를 덮었다.

“수술포를 덮겠습니다.”

그는 의사인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수술의 전 과정을 하나씩 설명해 주고 있었다. 설명을 안 해도 되는데, 그는 계속 말했다.

“자 이제 마취합니다.”

그는 배의 한쪽에 리도카인으로 부분마취를 했다. 리도카인이 몸에 들어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취하고 몇 분 후 그가 말했다.

“피부, subcu(피하) 엽니다.”

아!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배 위에 보비가 지나가는 느낌과 지혈하는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방층입니다.”
“복막입니다.”

배에 찌르는 통증이 왔고 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프시죠, 잠시만 참으세요.”

복막이 열린 후에는 통증이 가라앉았다. 복막 관을 집어넣기 위해 30도 정도 상체를 낮추었다. 몸에 뭔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자 복막 투석관을 집어넣습니다.”
“슈처(suture)하겠습니다.”

교수는 생생한 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끔찍했다. 과정을 모르면 그냥 누워있을 텐데, 머릿속에는 수술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수술 후에 회복실에 누워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이송반 아저씨가 미는 침대에 누워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이 낯설다. 배를 쳐다봤다. 배에는 무색의 긴 선이 달려 있고 주위는 거즈와 반창고로 싸여있다. 아내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웃으면서 아내를 쳐다봤지만, 마음은 나도 너무 어두웠다. 창밖은 역시 싱그러운 초록색이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배에 꽂혀있는 관이 이제 생명줄이다. 배를 쳐다보면서 희망보다는 그냥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냥 잘 살아봐야지.

<수상소감- 닥터박의원 박희철>

수상 내용이 들어있는 이메일을 설마하며 며칠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열어보고 수상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30여 년 전부터 의사라는 직업으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 좌충우돌하면서 그들과 함께 그들의 슬픔을 나누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고 자평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병에 걸려 절망하고 가슴속에 깊은 슬픔을 느껴보니, 환자들의 슬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이 없고 의학적인 문제에 차디찬 보통 의사였던 내가 그동안 환자들의 슬픔과 절망에 얼마나 진실됐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환자들이 나약해지고 힘들었을 때, 나는 그들의 하소연에 친절했지만, 사무적으로 들었고 상투적인 위로만 늘어놓았습니다. 앞으로 좀 더 인간적인 의사가 되려고 나의 투병기를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읽어 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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