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대 해운대백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문성호 부교수

수술 환자 대기실에 들어서려는데 뭔가 어수선한 기운이다. 타임아웃(환자 신원, 수술명, 수술 부위 등의 확인)을 하라고 나를 불렀던 간호사가 찡그린 얼굴로 입구에서 슬며시 내 옷깃을 잡는다.

“교수님, 환자가 대성통곡하고 있어요.”

정말 그랬다. 갑상선암 수술을 앞둔 내 환자는 대기실에서 명패를 찾지 않아도 알아볼 만큼 크게 울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옆자리 할머니 환자와 맞은편 중학생 환자도 이내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이기 시작한다.
‘아, 곤란하다.'

마취과 전공의와 젊은 외과 간호사들이 티슈를 뽑아다 주며 연신 ‘걱정 마라. 울지 마라.’ 한다. 당연하지만 소용없다. 그런다고 걱정이 안 되겠는가? 암이라는 진단명만 해도 청천벽력일 텐데, 난생처음 수술이란 걸 받게 생겼다. 잠시 후면 목을 열었다가 닫을 것이고, 출혈이 심할 수도 제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자기 손으로 동의서에 서명하고 내려온 상태다. 방금 보호자들과 헤어지며 지나온 자동문밖은 이역만리 같을 것이고,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만 가득할 것이다. 매일 밥 먹듯 환자 기관지에 마취가스를 불어넣고, 목을, 가슴을, 배를 열고 닫는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 많고 많은 불안과 공포에서 나온 눈물이다.

그랬다. 나도 무서웠다.
쉼 없이 날개를 젓는 히터 밑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등허리가 서늘했다. 밤새 뒤척이며 자는 둥 마는 둥 하고도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처음 스텐트를 넣었던 관상동맥이 다시 막혔다. 심혈관센터의 대기실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은 병색이 완연하거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40대 초반에 두 번째 스텐트. 기가 막히지만 그건 우리 부부만 감당하기로 하고,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가슴을 열고 다리에서 혈관을 떼어다 심장에 연결할지, 한 번 더 스텐트를 넣을지 결정을 못 해 아내에게는 알렸다. 한없이 미안하다. 아내의 어색한 표정과 가느다란 손을 뒤로하고 시술실로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직원이 오늘따라 더 커다랗게 보이는 방사선 기계 아래의 침대로 몸을 옮기라고 한다. 불과 몇 주 전, 나는 이 침대에 달려왔었다. 응급방송을 듣고 수술실에서 뛰어온 이 침대에는 심장 시술 중 의식을 잃고 숨을 쉬지 않는 환자가 심폐소생술 중이었고, 나는 피와 침이 범벅인 입을 벌려 기관삽관을 하고 앰부백으로 숨을 불어넣었었다. 침대에 눕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제발……

스텐트를 넣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동안 흰가운의 면회객들이 여럿 다녀갔다. 몸과 마음은 천근인데 귀는 한껏 가벼워진 우리 부부는 면회객들이 다녀갈수록 서울행을 고민하게 되었다. 주치의의 배려와 몇 개월의 기다림 후, 이윽고 마주한 서울 큰 병원 교수님은 백과사전처럼 두툼한 내 기록지를 이리저리 넘기다 멈추고 묻는다.
“문 선생님, 뭘 해드릴까요?”

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뭐부터 얘기해야 하나? 길을 걷다가 가슴에 번개를 맞은 느낌으로 가로수를 붙잡고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첫 흉통 이야기? 다시 막혀버린 관상동맥을 찢어가면서 넣었던 두 번째 스텐트 이야기? 내가 여기 왜 왔던가? 음…… 그래. 원인을 밝혀 주십시오! 담배는 입에 대본 적도 없고, 주 4회 새벽 수영으로 갈고닦은 실력으로 사회인 수영대회에서 심심찮게 입상했고, 체중이며 피검사 수치며 내 몸뚱어리에서 나올 수 있는 수치는 어느 것 하나 정상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고집해서 피를 한 바가지 뽑으며 시행한 유전자 검사, 구역질을 참아가며 시행한 심초음파에서도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관상동맥은 막혔습니다. 대체 원인이 뭡니까? 그래야 치료를 하든, 예방을 하든, 하다못해 생활 방식이라도 바꿀 것 아닙니까? 내가 외래에서 그렇게도 피하고 싶던 환자들, 묻는 말에 답은 하지 않고 화인지 하소연인지 구별이 안 되는 장황한 호소를 늘어놓던 환자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려 했다. 다짐을 한 나는 짧게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답답해서 왔습니다.”

찰나에 스친 저 모든 검사와 시술의 이야기는 이미 교수님 손 아래 백과사전에 빼곡히 적혀 있다.

“원인을 밝힐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 발버둥으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서 왔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고 속으로 위로해 보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덕담만 듣고 병원을 나오는 길에 시종 웃으려 애쓰던 아내가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인지 내 손보다 따뜻해졌다. 아내의 손은 유난히 가늘고 길씀하다. 손을 움직이노라면 그 선이 고와서, 넋 놓고 바라본 적도 있었다. 애 둘 낳아 키우고, 병약한 남편 시중이며 집안 대소사를 온전히 맨살로 받아낸 그때 그 섬섬옥수는 이제 장풍이라도 나올 듯 기운차다. 따뜻하고 당찬 손을 잡고 귀향길에 올랐다.

이제는 대기실의 거의 모든 환자가 훌쩍이고 있다. 노련한 회복실 간호사가 달려와 우는 환자 침대를 움직이더니 다른 환자들에게서 멀찍이 떨어트려 놓으며 빨리 어떻게든 하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뭘 어찌하겠는가? 답이 없다. 그 와중에도 타임아웃을 하겠다고 환자에게 이것저것 묻는 직원을 뒤로 물렸다. 계속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 환자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잠시 눈을 감는다. ‘이분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두 손을 꼭 잡은 채 가능한 한 천천히 또박또박 얘기한다.

“어머님, 저는 20년간 마취를 했습니다. 어머님과 같은 수술을 20년간 봐왔지요. 마취가 시작되면 이내 주무시겠지만, 잠든 사이에도 제가 계속 곁에서 기도하며 지키고 있을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지금 보시는 이분들 모두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까지 어머님 곁에서 함께 할 거랍니다. 저랑 같이 숨을 한 번 크게 쉬어 봅시다.”

내 위로가, 내 마취가 환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기를 바라며 수술실로 향한다. 전에는 왜 안 보였을까? 보지 않으려고 한 걸 수도 있겠다. 환자들의 두려움, 불안, 공포, 슬픔…… 가슴에 철심을 넣고서야 철이 드는 건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게 조금씩 보여서 스스로 놀라곤 한다. 환자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사실 무신론자에 마취는 17년 차다. 내 심장의 불온전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는가 하면 아직도 무섭고 불안하다.

정기적으로 하는 검사 날이 다가오면 이 두려움은 슬픔이나 우울 같은 제 동무들까지 스멀스멀 데리고 온다. 다만 무섭고 불안하다는 걸 알아차리려 애쓰는 중이다. 원인을 구하고, 막연하게 원망하는 마음 역시 사라진 건 아니다. 앙금으로 남아 있다가 잊을만하면 다른 감정들과 섞여서 나타난다. 이것 역시 답이 없다. 답이 없다는 걸 알기까지가 이리도 지난했나 싶다. 하지만 심장에 철심을 두 번이나 넣고도 아직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을 볼 수 있고, 게다가 내 손으로 밥도 벌고 있다. 살아내고 있는 매 순간이 사람들 사이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이라면 나는 도움 부자다. 운 좋게도 정말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았다. 무시로 아내와 아이들을 안고, 볼을 부비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고 있으면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그야말로 덤 같은 삶이 하루하루 덧대어지는 중이다. 그래서 오늘도 숨 한번 크게 쉬고, 감사한 마음으로 우는 환자 손을 잡고 수술방으로 들어간다.

<수상소감 - 해운대백병원 문성호>

가을 학회 참석차 탑승했던 11월의 기차 안에서 다섯 토막으로 된 초고를 썼습니다.
옆자리 아주머니는 항암치료를 위한 상경의 고단함과 슬픔을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있었고,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저는 부실한 심장의 기록물들을 품고 상경했던 ‘저의 기찻길’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엉엉 울던 환자와 시술실 침대에 떨면서 눕던 제 모습이 연이어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급하게 받아 적었고, 적던 손이 쉴 때쯤에는 서울이 가까워 있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멋지게 일필휘지한 것 같지만, 실상은 엉성한 기억의 조각들이었습니다. 조각들을 꿰어 맞추는 데는 오히려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맞추면 맞출수록 잊은 줄 알았던 슬픔과 부끄러움이 스며 나와서 여러 번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나의 부끄러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간신히 완성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경험담입니다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면을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선 귀한 상을 주신 한미수필문학상 관계자분들과 청년의사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부족한 제 글에 과분한 영광입니다. 제가 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북돋워 주신 부산백병원, 해운대백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실의 식구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투박한 제 글에 용기를 주신 이새움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그라들었던 손과 마음을 펴고 응모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인현신.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퉁치기에는 고맙고,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손잡고 함께 나아가 봅시다. 건강합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