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발렌티노 박사, 8인자 제제의 新 역할 조명

혈장 수혈부터 시작해 혈액응고인자 제제의 개발, 항체 치료제 및 유전자 치료제의 등장까지 지난 100년에 걸친 혈우병 치료의 역사는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생명을 구하는데 급급했던 과거 혈우병의 치료 목표는 다양한 치료제들의 등장으로 상향돼 이젠 비환자군과 같은 삶의 정상화, 그를 넘어 완치를 바라는 단계까지 진전됐다.

특히 반감기 연장 제제의 개발 등 응고인자 제제의 발전은 혈우병 치료 역사의 큰 축을 담당해 왔으며, 최근에는 혈우병 치료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인 관절 건강에 대한 새로운 역할이 밝혀지며 다시금 주목 받고 있다.

이에 지난 달 말 개최된 대한혈액학회 국제학술대회(ICKSH 2024)에 발표 연자로 초청된 미국 러시대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인 레너드 발렌티노(Leonard A. Valentino) 박사를 만나 혈우병 치료 혁신의 역사와 발전, 최근 재조명 받고 있는 응고인자 제제의 새로운 역할 및 전망에 대해 들어봤다.

레너드 발렌티노 박사는 혈우병 치료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응고인자 제제를 활용한 예방요법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미국 러시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레너드 발렌티노(Leonard A. Valentino) 박사
미국 러시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레너드 발렌티노(Leonard A. Valentino) 박사

-혈우병 치료제들이 발전하면서 응고인자 제제뿐만 아니라 항체 치료제, 유전자 치료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치료 옵션들이 개발됐다. 이로 인해 혈우병의 궁극적인 치료 목표도 향상됐을 것 같다.

현재 혈우병 치료는 무증상 출혈을 포함한 모든 출혈을 예방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다. 중증 혈우병 환자들의 잦은 출혈은 관절 손상을 일으키고, 이는 영구적인 장애 가능성이 있는 관절염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환자들이 느끼는 부담은 신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 정서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출혈 외 합병증이 발생한 환자들은 심리적으로 강한 우울감을 느낄 수 있으며, 관절 관련 합병증을 치료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비용도 수반될 수 있다.

과거를 반추해보면, 20, 30, 40년 전 혈우병의 치료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것'에 집중돼 있었다. 그간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는 높은 비용 부담 등으로 인한 제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혈우병 치료 목표는 혈우병 환자들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혈우병 환자들이 최상의 치료 결과를 바탕으로 비환자군과 동일한 삶을 누리는 것 즉, '건강 형평성(health equity)'까지 아우르게 된 것이다.

일례로 표준 반감기 제제에 이은 반감기 연장 제제의 등장을 생각해보자. 반감기 연장 제제로 주입 횟수를 줄이는 혁신은 환자의 신체적 부담을 비롯해 심리적, 정서적 부담까지 경감시켰다. 이러한 치료제들을 통한 예방요법은 추가적인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데, 기존 중증이나 중등증 혈우병 환자에게 가장 흔한 합병증인 출혈이나 관절 손상을 예방하기 때문이다. 관절 손상은 심각한 관절염을 유발하며, 더 나아가 정형외과적 수술, 관절 치환 등 다양한 사회적 비용을 상승시킨다.

이처럼 치료제의 발전으로 혈우병 환자들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응고인자 제제부터 유전자 치료제, 단클론 항체 치료제 등 치료 혁신을 통해 비환자군과 동일한 일상의 영위라는 목표 역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관절 건강에 미치는 8인자 제제의 직접적인 역할이 규명되며, 8인자 제제가 재조명 받고 있다.

8인자 제제가 관절 건강에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입증하는데 있어 최근 2년간 많은 진전이 있었다. 체내 8인자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관절 내 출혈은 크게 세 가지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먼저 관절에 출혈이 발생하면 혈액 속 철분에 의해 혈관 형성이 촉진되는 '혈관신생'이 일어날 수 있다. 이렇듯 혈관이 빠르게 증식하면 활막의 증식 가능성도 높아진다. 활막은 관절 내 염증 세포로 구성된 조직으로 매우 빠르게 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활막이 비대해지면 출혈 발생 가능성과 빈도가 높아지고, 다시 연골이 소실되고 파괴되는 연골 퇴화로 이어질 수 있다.

8인자 제제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결과를 방지함으로써 관절 기능의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다. 선천성 혈우병 A 환자를 대상으로 8인자 제제를 통한 예방요법을 평가한 PROPEL 임상 연구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보다 높은 수준의 8인자 제제를 투여함으로써, 혈관의 비정상적 신생과 활막의 증식, 관절 및 연골 퇴화 등 연구 시작 시 높은 수치를 보였던 세 가지 주요 바이오마커들이 모두 감소됐음을 보여줬다.

또한 최근에는 8인자 제제와 림프계와의 연관성도 밝혀졌다. 혈관이 혈액과 철분을 관절로 운반할 때, 림프관이 이를 관절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하는데, 8인자가 부족하면 림프관 혈관이 와해돼(disorganized)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실제 혈우병 생쥐모델 대상의 전임상 연구에서는 8인자 결핍 생쥐모델에서만 활막 내 혈철분 제거에 기여하는 림프관의 신생에 장애가 발견됐으며, 제거되지 않은 침착된 혈철분이 발견됐다. 또한 해당 생쥐모델에게 부족한 8인자를 직접 보충하면 림프관이 안정화되고 혈액을 관절 밖으로 배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는 관절 출혈 후 치유 과정에서 8인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다. 지혈을 넘어 추가적인 관절 건강의 정상화를 고려하면, 비응고인자제제로 치료 받은 환자들 역시 관절, 연골 및 림프관의 정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8인자 제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항체 치료제와 8인자 제제의 병용요법도 가능하다고 보나.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 혈우병 환자의 치료 목표에는 출혈 예방과 더불어 관절 건강의 증진도 포함된다. 체내 8인자가 부족하면 뼈가 얇아지고 골다공증이 발생해 골절의 위험 역시 높아진다. 때문에 다른 기전의 약제로 출혈을 조절한다 하더라도, 환자의 관절과 뼈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8인자의 역할이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고 적극 활용하는 것은 환자에 따른 최적의 치료 결과를 도출하고 맞춤 치료로 나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출혈 예방과 관절 등에 발생하는 합병증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약물을 조합해 병용하는 탐구적 자세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맞춤치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국의 혈우병 환자들은 자신의 약동학(Pharmacokinetics, 이하 PK) 프로파일을 잘 인지하고 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상황은 어떤가.

혈우병 환자들에게 PK란 자신의 신체가 8인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측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도구다. 응고인자 제제를 통한 개인 맞춤형 예방요법은 치료 후 8인자가 체내에 머무는 반감기를 측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여 후 8인자 활성도가 얼마나 높게 올라가는지, 또 얼마나 오래 그 활성도에 머무는지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동차로 예를 들어보자. 누구나 차량의 연료 게이지가 비어있다면 운전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전기차를 가지고 있다면 방전을 피하기 위해 배터리의 수준을 알고 싶어할 것이다. PK 역시 마찬가지다. PK 모니터링을 통해 환자는 스스로를 출혈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사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개별 맞춤형 치료에는 PK 외에도 여러 요소가 고려돼야 한다. 환자 개개인의 생활 방식, 운동 습관, 유전적 요인 등 환자를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도 중요하다. 환자들이 언제, 어떤 스포츠에 참여하는지, 그 운동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치료에 얼마나 잘 순응하는지 역시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현대 혈우병의 치료는 암과 같은 정밀의료의 방향과 그 결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정밀의료는 환자의 유전적 배경, 약물뿐만 아니라 환자가 사는 환경을 함께 고려한다. 미국에서는 치료를 위한 환경, 즉 환자의 지불 체계나 의료 시스템 접근성 등 사회적인 결정 요인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한 치료를 추구하고 있다.

-치료 접근성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현재 한국의 8인자 제제 급여 기준이 '혈중 8인자 활성도가 1% 미만인 환자' 대상으로 설정돼 있어, 세계혈우연맹이 권고하는 3~5% 수준의 응고인자 활성도를 만족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과 독일에서 연구된 데이터에 따르면, 최저치 1% 수준으로만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여전히 심각한 관절 질환을 경험하고 있으며, 무려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상황이 그렇다면, 한국 환자들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분석해, 더 높은 8인자 활성도 기준 설정이 필요함을 정부와 신속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3세의 어린 아이들이 심각한 관절 장애를 안고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데이터는 논의의 근거가 되는 소중한 자산이다. 반드시 많은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다. 환자 대상의 설문조사가 대표적이다. 환자의 치료 결과와 체감하는 치료 부담, 혈우병으로 인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경험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이처럼 비용효과적인 도구를 활용해 데이터를 생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건당국과 변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혈우병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를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궁금하다. 완치인가, 아니면 비환자군과 같은 일상의 정상화인가.

혈우병의 완치는 분명 궁극적인 목표다. 그러나 아직 수십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유전자 편집(Gene editing) 기술이 혈우병 치료에 도입되기 시작했으나, 혈우병이 갖는 유전적 소인에 변화를 주지는 못한다. 혈우병 유전자를 가진 부모는 여전히 이 유전자를 자녀에게 물려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치료 방향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건강 형평성(health equity)'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혈우병 환자도 혈우병이 없는 비환자군과 동일한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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